[쿠킹] 인생 커피 맛을 갱신해줄,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

중앙일보

입력 2022.10.14 07:00

정동욱의〈커피 일상〉
커피는 참 이상합니다. 필수영양소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허기를 채워주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마시는 걸까요. 생존을 목적으로 진화한 인간에게 쓴맛은 독, 신맛은 부패한 음식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단맛을 넘어 신맛과 쓴맛까지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죠. 커피가 바로 그렇습니다. 바리스타 정동욱의 ‘커피 일상’에서는 오랜 시간 각인된 본성마저 거스르며 이 검은 액체를 거리낌 없이 사랑하게 된 이유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라이트 로스팅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모습. 묽고 가볍게 떨어진다. 사진 김다정

라이트 로스팅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모습. 묽고 가볍게 떨어진다. 사진 김다정

“오늘 싱글 에스프레소는 뭐예요?”
“‘케냐 야라 피베리(KENYA YARA PB)’입니다. 라즈베리 톤의 산미와 매끈한 마우스필(Mouthfeel, 음료를 입에 넣었을 때 느낌)이 참 좋습니다.”
“오, 그럼 블렌드 에스프레소 주시고, 케냐 싱글도 한 잔 주세요.”
“일행분이 계신가요?”
“아뇨. 제가 두 잔 다 마시려고요.”
“그럼 블렌드 에스프레소를 먼저 드릴게요. 다 드신 후에 케냐 싱글 에스프레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주셔도 되는데요.”
“순서대로 드시는 게 더 맛있어서요.”
“아, 네. 그럼 그렇게 부탁드려요.”

감각을 자극하는 새로운 경험, 라이트 로스팅한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

주문을 받고 머신 앞으로 오니, 우리 직원 ‘다운’ 님이 블렌드용 에스프레소 잔을 이미 세팅해 두었네요. 메뉴를 만들고 서빙하는 과정까지 바리스타들 간에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3년 넘게 함께 커피를 만들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일이기도 하죠. 그건 그렇고, 제가 블렌드 에스프레소를 마신 다음 ‘케냐 야라 피베리’라는 라이트 로스팅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를 마실 것을 권한 이유가 궁금하시겠죠. 이제 곧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자. 순서대로 먹어봐요.” 직원들 앞에는 다크 로스팅 에스프레소와 라이트 로스팅 에스프레소가 각각 놓여있습니다. 첫 번째 다크 로스팅, 두 번째 라이트 로스팅, 그리고 다시 다크 로스팅 순서입니다. 즉, 처음과 마지막 커피는 같습니다. 같은 커피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한번 살펴보는 거죠. 반신반의하던 직원들은 순서대로 맛을 보더니 미묘한 웃음을 짓습니다.

“아니 왜 다르지? 왜 달라요, 사장님?”
“어떻게 다르죠?”
“처음과 두 번째까진 다 맛있어요. 특히 두 번째 먹은 라이트 로스팅 에스프레소는 평소보다 더 맛있는 거 같은데요?”
“세 번째는 어땠어요?”
“훨씬 다크해요. 첫 번째로 맛본 커피인데도 굉장히 다르게 느껴져요.”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는 다크 로스팅 에스프레소와 라이트 로스팅 에스프레소(사진)로 나뉜다. 사진 김다정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는 다크 로스팅 에스프레소와 라이트 로스팅 에스프레소(사진)로 나뉜다. 사진 김다정

왜 그럴까요? 바로 ‘역치’ 때문입니다. 우리 감각은 모든 자극에 공평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감각은 예민하고 불필요한 감각에는 둔해집니다. 그리고 같은 자극이 반복되어도 감각이 무뎌집니다. 다크 로스팅의 블렌드 에스프레소가 입속으로 들어오면 초콜릿 톤의 진한 향미가, 체리 톤의 산미가, 설탕 같은 단맛이 우리의 후각과 미각을 강하게 자극합니다.

에스프레소는 보통 농밀하고, 그로 인해 우리를 완벽히 커피에 몰입하게 합니다. 일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농도와 강도와 밀도의 음료이죠. 다크 로스팅한 에스프레소의 플레이버(flavor)에 장악된 우리의 감각은 불균형한 상태가 됩니다. 다크 로스팅의 맛에는 무뎌지고 그 외에는 예민해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라이트 로스팅 에스프레소가 입속으로 들어옵니다. 다크 로스팅 에스프레소와는 교집합이 적은, 새로운 에스프레소입니다. 이 순간 우리의 감각은 새로운 자극에 집중합니다. 네, 화사한 꽃향기와 섬세한 과일 향들을 하나하나 짚어낼 수 있죠. 내 감각이 원래 이렇게 좋았던가, 아니면 오늘따라 커피가 더 맛있게 된 건가, 생각할 정도로 말입니다. 아름답고 훌륭한 커피의 맛에 새삼 놀라게 되는 거죠.

‘역치’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생물이 외부환경의 변화, 즉 외부 자극에 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라고 나옵니다. 역치가 낮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자극에도 반응한다는 뜻이고, 무뎌졌다는 말은 역치가 높아졌다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역치에 자극을 주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맛본 황홀했던 커피 한 잔, 혹은 첫사랑의 경험처럼 말입니다.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는 그대로 마시다가 절반 정도 남았을 때 설탕을 넣어서 마시면 새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사진 김다정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는 그대로 마시다가 절반 정도 남았을 때 설탕을 넣어서 마시면 새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사진 김다정

“그때 맛본 그 커피 맛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커피가 아름다운 액체라는 것을 처음 느꼈던 순간의 이야기죠. 그런데 그 순간 이후로 커피의 아름다움에 관한 역치가 무한히 높아졌을지도 모릅니다. 더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할 수 없게 된 것이죠. 저는 이런 분들께 라이트 로스팅한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를 권하고 싶습니다. 라이트 로스팅 에스프레소가 커피에 관한 이전의 기억을 갱신해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라이트 로스팅 에스프레소는 조금 다르게 추출합니다. 에스프레소라고 하면 끈적하게 떨어지는 장면을 연상하지만, 라이트 로스팅 커피는 그보다 묽고 경쾌하게 떨어집니다. 다크 로스팅과 같은 방식으로 추출하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텁텁한 커피가 만들어지죠. 추출법이란 재료인 원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오늘은 19.5g의 원두를 포터필터에 담아 비교적 빠른 시간인 20초 동안 42g을 추출합니다. 밝고 매끈한 에스프레소의 표면이 아름답습니다.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장면을 같이 지켜보던 다운 님이 스푼과 설탕을 챙겨 손님께 커피를 내갑니다. 커피가 가진 향미와 특징을 차분히 설명하고서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본 저는, 커피를 만드는 우리의 일상이 커피처럼 꽤 아름답다고 새삼 생각해봅니다.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를 마신 후 잔에 남은 달콤한 향까지 즐겨보자. 사진 김다정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를 마신 후 잔에 남은 달콤한 향까지 즐겨보자. 사진 김다정

① 먼저 눈으로 매끈한 크레마를 감상합니다.
② 잠시 사진을 찍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다음엔 향을 맡아 봅니다.
③ 커피의 정보가 적힌 카드를 같이 서브해 주었다면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스푼으로 커피를 저어줍니다.
④ 네 번째로 한 모금 입에 머금습니다. 그 순간 비강을 가득 채우는 향을 느껴봅니다. 한 모금 더 머금어 봅니다. 이번에는 혀를 자극하며 커피의 맛을 느껴봅니다.
⑤ 커피가 절반 정도 남았을 때 설탕을 넣어도 좋습니다. 과일 주스처럼 변한 에스프레소는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⑥ 마지막으로 비운 잔에 남아 있는 달콤한 향을 맡아 봅니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를 즐겁게 맞이합니다.

정동욱 커피플레이스 대표 cook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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