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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우물과 불씨 끊는다” 규약 어기면 마을서 쫓겨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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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농촌 마을은 어떻게 운영됐나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과거의 마을에 대해 낭만적인 감정이 있다. 포도, 사과, 닭서리까지 범죄가 아니었던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귀염 속에 친구들과 지칠 줄 모르고 놀았다. 학원은커녕 방학숙제조차 하지 않아도 됐던 정녕 자유의 하루하루. 구수한 여물 냄새에 이어 짚불에서 끓는 청국장 내음, 그리고 소 뜯기던 들판과 똥개인 똘똘이가 뛰노는 타작 마당. 그 마당에선 면장 할아버지가 잡아 온 뜸부기를 안주로 할아버지께서 기분 좋게 한잔하시곤 했다. 겨울이면 사랑채 고드름 녹는 물이 떨어지는 처마 안쪽 툇마루와 섬돌에 앉아 햇볕을 쬐며 두런두런 한참을 얘기하시던 동네 어른들. 어찌 꿈엔들 잊힐 리야.

보통 마을이나 부락을 도시와 달리 공동체라고 부르는데 공동체라는 말이 갖는 어감 때문인지 그 삶에 낭만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곤 한다. 따뜻하고 정이 넘치며 서로 돕는 평화로운 광경 말이다. 그렇지만 실제 역사를 관찰할 때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사례 하나, 폴리네시아의 어떤 부족에게 있었던 일이다. 그곳 부족민은 함께 배를 타고 나가서 생선을 잡았고 가족의 수를 헤아려 그에 따라 생선을 나누며 생계를 이었다. 그런데 부족민 하나가 꾀를 부리며 일도 안 하고 생선만 받아 챙겼다. 꽤 한동안 사람들은 그에게 생선을 분배했다. 그리고 어떤 시점이 지난 뒤에 그를 처치했다. 물에 빠뜨려 죽여버린 것이다. 공동체의 처벌이었다.

마을공동체는 낭만이 아닌 현실
공유지 가꾸며 사유재산도 인정

향약·동계 등 상호부조 풍속 정착
농사부터 놀이까지 함께 어울려

상·중·하 수준별 처벌로 기강 잡아
‘동네에 술 사기’ 익살스런 징계도

거지가 오면 남은 밥 차려줘

풍속화가 김홍도의 ‘우물가’. 보물로 지정된 『단원 풍속도첩』에 포함됐다. 조선시대 우물은 일상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마을 자치 규약을 어기면 우물을 함께 쓰지 못하게도 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풍속화가 김홍도의 ‘우물가’. 보물로 지정된 『단원 풍속도첩』에 포함됐다. 조선시대 우물은 일상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마을 자치 규약을 어기면 우물을 함께 쓰지 못하게도 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사람들은 땅에서 나는 생산물로 먹고사는 농업사회라는 조건에서 살았기 때문에 대체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농사뿐 아니라 마을 길을 내는 일부터 추수 뒤 농악이나 신년 대보름 놀이까지 함께했다. 아이들은 동네 사람들의 눈길 속에서 보호받으며 자랐고, 나이에 따라 적절한 대우를 받으며 늙어갔다. 거지가 오면 개다리소반에 남은 밥을 차려주었고, 어떤 병에 연원하였는지 모르는 ‘미친 사람’도 한동네 사람으로 같이 살았다.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사회형태’라는 관점을 가지고 조선의 농촌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거나 이용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는데, 어떤 점에서는 맞다. 논과 밭, 집터는 조선시대에도 사유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땅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3월 칼럼에서 밝혔듯 산림천택이라고 불리는 공유지가 조선사람들 생계의 상당 부분을 보장하는 유력한 수단이 됐기 때문이다. 나는 산림천택을 이용하는 데 대한 세금이 바로 현물로 내던 공물(貢物)이라고 본다. 공물을 전세(田稅)로 바꾼 뒤(대동법이다!) 대동미가 12두로 정해진다. 논밭에서 4두의 전세(田稅)를 거두었으니, 이 비율로 계산하면 사람들은 생계의 4분의 3을 공유지에서 얻은 건가 하는 상상도 하게 된다.

모든 공동체에는 사유재산이 있다. 호미나 낫 같은 도구, 볍씨나 옥수수 같은 경작에 필요한 씨앗과 열매, 그릇이나 항아리,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옷, 어떤 형태의 가옥 등 재산이나 자원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일은 세계 곳곳의 자본주의 이전 공동체에서 흔히 발견된다. 공동체에는 사유재산이 없을 거라는 선입견은 사적 소유의 발생이 공동체의 해체를 가져오고, 사적 소유의 확대가 생산력 발전과 연결된다는 근대주의 관점에서 비롯된 소산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는 이데올로기의 영향과 토지와 노동까지 팔고 사는 상품사회의 전면화로 강화됐다.

중국서 들여온 향약의 범주 넓혀

전남 영암군 구림마을 대동계 계원들이 규약을 살펴보고 있다. 1565년경에 만든 구림 대동계는 옛 마을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중앙포토]

전남 영암군 구림마을 대동계 계원들이 규약을 살펴보고 있다. 1565년경에 만든 구림 대동계는 옛 마을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중앙포토]

지난달 칼럼에서 말했듯이 조선 사회는 이동이 잦았는데 유럽 장원(manor)이나 일본 무라(村) 같이 강력한 공동체적 속박=규정이 적었기 때문이다. 시대나 사회에 따라 공동체는 다르게 존재했다. 조선식 공동체가 있었다. 선조 32년(1599) 경북 안강현(安康縣) 양좌동(良佐洞) 주민들이 물길을 놓고 경주 관아에 소송을 제기했던 사례처럼 마을 자체가 소송의 주체로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심희기, 2021)

마을 운영 원칙을 기록한 대동계 문서. [사진 문화재청]

마을 운영 원칙을 기록한 대동계 문서. [사진 문화재청]

사유가 된 농지와 공유지인 산림천택은 모두 고유의 지역 생태계에 통합돼 있었다. 향약이나 동계(洞契)·족계(族契) 등은 그 생태계의 유지를 위한 규약이었다. 양반의 지방 지배로 보든 자치규약이라는 관점으로 헤아리든지 향약의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4조목은 인간관계와 집단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기본 원칙이자 방향을 의미한다. (김용덕, 1980) 이는 상부상조가 농촌사회에서 얼마나 일반적 덕목인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상호부조는 동물에서 인간까지, 과거에서 현재까지, 농촌이든 도시든 일상적으로 유용했고, 윤리적으로 인간성이 고양되는 실천 덕목이라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

1516년 향약 보급을 위해 경북 성주군에 세워진 월회당. [사진 성주군청]

1516년 향약 보급을 위해 경북 성주군에 세워진 월회당. [사진 성주군청]

주자(朱子)가 편집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향약의 ‘도입’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일면적인 관찰이다. 『여씨향약』의 도입은 조선 전래 ‘인민의 풍속’인 계(契)나 상부상조의 전통을 통해 현실화했던 것이고, 상부상조의 범주도 『여씨향약』보다 조선화한 향약이 훨씬 넓었다. (정진영, 2013) 그리고 지역에서 발견되는 규약에 신분제적 요소가 배어 있더라도 그 규약이 갖는 보편성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향약에는 벌칙도 있었다. “상벌(上罰)은 관청에 알려 벌을 내리게 하고, 우물과 불씨를 상통하지 않는다. 중벌(重罰)은 명부에서 이름을 빼고 고을에서 불치(不齒)한다. 하벌(下罰)은 손도(損徒)하고 공공 모임에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향벌(鄕罰)이라고 했다. 우물과 불씨를 서로 쓰지 않는다는 말은 같은 동네에서 살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포함된 출향(黜鄕·고을에서 쫓아냄)이나 출동(黜洞)은 기존 생활기반으로부터 쫓겨남을 의미한다.

협력과 규율은 동전의 앞뒷면

향약의 기본 4원칙을 새긴 편액을 달았다. [사진 두피디아]

향약의 기본 4원칙을 새긴 편액을 달았다. [사진 두피디아]

그다음으로 처벌의 강도가 낮은 불치(不齒)는 동네에서는 살게 하되 끼워주지 않는 것이다. 그 아래 단계인 손도(損徒)는 일시적 자격정지를 뜻한다. 이외에 사람들 앞에서 사과하는 면책(面責), 요즘으로 치면 사과주를 사는 주벌(酒罰) 등도 있었다. 이러한 형벌은 늘 생활을 하던 동네나 고을에서 시행됐기 때문에 국법(國法)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박현순, 2017)

그리고 농민의 기초적 생활단위인 마을(자연촌)을 범위로 소규모화하면서 동계는 마을 주민의 일상생활이 더욱 긴밀하게 결합될 토대를 제공했다. (이용기, 2017) 이와 같은 향약과 동계 등 자발적 규약의 실천을 통해 마을 주변의 산과 숲, 강과 바다의 이용에 관한 공동체의 관습과 규율을 축적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숲 공유를 위한 입회(入會)’ 조직이었던 송계(松契)도 이런 규율을 정해 놓고 있었다.

다양한 공동체 내지 결사체에서 협력과 상호부조는 늘 규율 및 강제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은 강조돼야 한다. 공동체와 관련하여 협력과 상호부조만 강조하면 역사적 낭만주의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규율이나 강제가 없는 공동체를 상정하면 비역사적 결론에 빠지고 이데올로기적 왜곡으로 이어진다. 규율이 없는 공동체는 없다.

공유지, 관리와 통제의 땅

개렛 하딘

개렛 하딘

미국 생물학자 개렛 하딘(사진)은 1968년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에서 공유지의 이용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고 주장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목초지는 가능한 많은 가축을 풀어놓으려는 이용자의 과잉 방목을 초래하여 황폐해진다는 논리였다. 이 주장은 ‘역시 주인이 있어야…’ 하는 사유재산주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공유지의 사유화를 부추기는 근거가 됐다.

인간의 역사에서 공유지는 접근과 이용이 제한됐다. 관리권과 규칙 통제가 공유지의 핵심적 특징이다. 공유지가 누구나 언제든 이용하는 오픈 엑세스일 수 없다. 그래서 때 아닐 때 소나무를 베면 징계하고, 어촌계에서 갯벌의 굴 따기는 때를 정하여 통제한다. 그런 점에서 2015년 탄소중립을 위한 파리협정은 지구라는 공유지의 지속적 이용을 위한 제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하딘은 죽기 전에 자신의 논문을 ‘공유지의 비극’이 아니라 ‘관리되지 않은 공유지의 비극’으로 불렀어야 한다며 오류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오류는 민영화·선진화·고도화라는 이름으로 반복되고 있다.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