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의 '하락 마이웨이'…원화값, 엔·파운드보다 더 떨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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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원화가치가 '마이 웨이' 중이다. 전 세계 다른 통화와 비교해 하락 속도가 더 빠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긴축이 불러온 강달러에 보폭을 맞춰 내려가던 원화값이 궤도 이탈을 한 모양새다. 지난달에는 주식과 채권에서 모두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며 원화값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원화값 하락에 자본 유출도 우려도 커졌다.

13일 달러당 원화값은 전 거래일보다 6.4원 내린 1,431.3원으로 마감했다. 사진은 이날 명동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모습. 연합뉴스

13일 달러당 원화값은 전 거래일보다 6.4원 내린 1,431.3원으로 마감했다. 사진은 이날 명동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모습. 연합뉴스

13일 한은이 발표한 ‘9월 이후 국제금융·외환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원화가치(달러당 1435.2원)는 지난 8월 말(달러당 1337.6원)보다 6.8% 하락했다. 같은 기간 주요 6개국 통화대비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1973=100)는 4.2%가 뛰었다. 달러 가치의 상승 폭보다 원화가치 하락 폭이 더 컸다.

원화값의 낙폭은 선진국과 신흥국의 통화를 통틀어서도 유독 컸다. 선진국 통화 중 유로화(-3.4%)와 영국 파운드화(-5.6%), 일본 엔화(-4.7%)가 모두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하락 폭은 원화보다 적었다.

영국은 지난달 감세 정책을 둘러싼 혼선으로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하는 등 홍역을 앓았다. 경기 부양을 위해 돈을 풀고 있는 일본의 엔화도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일본은 엔화값 급락에 대응하기 위해 시장 개입에도 나서고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수퍼 달러의 질주 속 신흥국 통화도 원화보다는 선방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5.2%)와 중국 위안화(-3.7%), 인도네시아 루피아화(-3.3%), 인도 루피화(-3.2%), 브라질 헤알화(-2.2%), 튀르키예 리라화(-2%) 등의 낙폭은 원화보다 적었다. 멕시코 페소화(0.3%)의 경우 통화 가치가 오히려 뛰었다.

지난 8월까지만 해도 원화가치는 달러값 상승에 보폭을 맞춰 내려왔다. 지난 8월 중 미 달러값은 2.6% 올랐는데, 원화값은 2.9%가 하락했다. 당시만 해도 엔화(-4.1%)와 파운드화(-4.6%)보다 통화 가치가 덜 떨어졌다. 이창용 한은 총재가 지난달 26일 국회 기재위에서 “올해 원화 절하 폭은 주요국 통화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답했던 이유다.

하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등 긴축 강화와 세계 경기 둔화 우려, 무역수지 적자 폭 확대 등으로 지난달 원화 가치는 다른 통화에 비해 더 떨어졌다. 대외 환경 악화와 함께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떨어지면서 원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백석현 신한은행 연구원은 “세계 경기가 하강 국면을 탈 때마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원화 약세가 더 두드러지는 국면이 자주 있었다”며 “최근에는 반도체 경기 하락 외에도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갈등 격화 등 각종 악재가 쌓여 시장 참가자들이 한국 원화를 더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중국 위안화 약세도 원화값에는 부담 요인이다. 이 총재는 지난 12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9월 들어서 원화가 달러 강세보다 더 약세가 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원화는 중국 위안화의 프록시(proxy·대리) 통화로도 여겨지고 있어 중국이 나빠지면 무역이나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자금의 한국 엑소더스도 원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9월 외국인 증권 투자자금은 22억9000만 달러가 순유출됐다. 지난 6월(-7억8000만 달러) 이후 3개월 만의 순유출 전환이다. 특히 주식(-16억5000만 달러)과 채권(-6억4000만 달러) 시장에서 모두 돈이 빠져나갔다. 주식과 채권 자금이 동시에 빠져나간 건 2020년 12월 이후 처음이다.

외국인 증권 투자자금은 올해 1~9월까지 25억5000만 달러가 순유입됐다. 다만 지난해 같은 기간(254억7000만 달러)과 비교해 유입액은 큰 폭으로 줄었다. 특히 순유입이 계속되던 채권 투자자금도 지난 8월(-13억1000만 달러)부터는 순유출로 전환됐다. Fed가 지난 6월과 7월 잇따라 기준금리를 0.75%포인트(자이언트 스텝) 올린 것이 도화선이 됐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한은은 급격한 자금 유출은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주요국 중앙은행이나 국부펀드 등 공공자금이 외국인 채권 투자 자금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다. 다만 한·미 금리 역전 폭이 확대될 경우 자금 유출이 본격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현재 한·미 기준금리 역전 폭은 상단기준으로 0.25%포인트지만, 올해 연말에는 1.25%포인트까지 벌어질 수 있다.

금리 격차에 따른 자본 유출이 원화 가치를 더 끌어내릴 수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 교수는 “한은이 금리를 더 올리기 어렵다는 신호를 주면서 한·미 금리역전에 대한 우려가 훨씬 커졌다”며 “금리 역전 폭이 커져 외국인 자금 유출이 본격화될 경우 충격이 클 수 있다”고 말했다.

시장은 연말까지 원화가치가 '1달러=1500원' 선까지 밀릴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다. 미국의 수퍼 긴축과 강달러 기조가 이어지고, 중국의 경기 둔화 우려 속 무역수지 적자 등이 가세하면서 원화값의 약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한은이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하며, 한·미 금리 격차 줄이기에 나섰지만 원화 약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란 분석이 많다.

이 총재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환율의 변동을 크게 좌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강달러에 대한 예상”이라며 “우리가 어떤 조치를 하더라도 큰 틀의 흐름은 미국의 긴축 정책이 어느 속도로 어떻게 갈지에 따라 국제금융시장을 흔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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