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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러시아 여성, 꽃 화관 쓰고 상암동 50번 왔다…소원 뭐길래 [별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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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우크라이나분들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해요.” 

미하일로바 아나스타시야(26)는 12일 노란색 꽃화관을 쓰고 자유러시아기(백청백기)를 몸에 두른 채 서울 상암문화광장에 섰다. 바닥에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응원해주세요!’라는 문구와 우크라이나 대사관 공식 후원 계좌가 적한 플래카드를 깔아뒀다.

아나스타시야가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에 나선 건 지난 6월 8일부터 50여 차례째다. 월·수·금 오후 12시부터 2시간 동안 늘 상암동 문화광장에서 나왔다. 한국어가 유창한 그는 “화관은 우크라이나에서 여자가 결혼할 때 쓰는데, 전쟁으로 많은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남편과 남자형제를 잃는 경우가 많아 경각심을 주기 위해 썼다”고 설명했다.

 12일 오후 1시 30분 서울 마포구 상암문화공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미하일로바 아나스타시야(26)를 만나 인터뷰했다. 함민정 기자

12일 오후 1시 30분 서울 마포구 상암문화공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미하일로바 아나스타시야(26)를 만나 인터뷰했다. 함민정 기자

원자물리학 전공하던 러시아 대학생, 한국에 오다  

 아나스타시야는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러시아인이다. 2016년 12월 처음 한국에 왔다. 시위할 때 주로 우크라이나 국기를 몸에 두르고 있어 “우크라이나인이냐”는 오해를 받을 때도 많다. 한국에 오기 전까진 ‘모스크바 공학 물리연구소 부속 국립 원자력 대학’에서 원자물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이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건 고등학생 때 한국 드라마를 접하면서였다. 어머니의 반대가 있었지만 무릅쓰고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결정적 계기는 ‘언론’이었다. 한때 기자가 꿈이었지만 러시아에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푸틴이 대통령이 되면서 비판 목소리를 내던 언론이 사라졌다. 러시아에서 기자라는 직업은 죽었다. 사람들을 선동하고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할 뿐이다. 한국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라고 생각해 오게 됐다”고 말했다. 2018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한 그는 지난해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PD시험을 준비 중이다. 내년 2월에 있을 귀화시험도 공부하고 있다. 아래는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인터뷰 내용.

아나스타시야가 2020년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열린 한 가수의 콘서트에서 영상 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 아나스타시야

아나스타시야가 2020년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열린 한 가수의 콘서트에서 영상 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 아나스타시야

시위에 처음 참여하게 된 계기는
한국에 사는 러시아인이 모여있는 단체 채팅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집회’를 연다는 안내 포스터를 봤다. 3월 6일부터 주한 러시아·우크라이나·우즈베키스탄 등 내·외국인들로 구성된 ‘보이시스 인 코리아(VOICES IN KOREA)’ 회원들과 함께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 현재 30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 주말엔 러시아 대사관, 이태원, 홍대 등을 돌며 전쟁 반대 집회를 했다.
시위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고
소극적이고 겁이 많은 성격인데, 집회를 하면서 두려운 게 없어졌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용기를 냈다. 러시아인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집회를 계속하는 책임을 보여줘야 한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주한 러시아·우크라이나 등 내·외국인들로 구성된 보이시스 인 코리아(VOICES IN KOREA) 회원들이 러시아 전쟁 반대 집회를 열었다. 맨 앞에 자유러시아기(백청백기)를 들고 있는 인물이 미하일로바 아나스타시야(26)다. 사진 아나스타시야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주한 러시아·우크라이나 등 내·외국인들로 구성된 보이시스 인 코리아(VOICES IN KOREA) 회원들이 러시아 전쟁 반대 집회를 열었다. 맨 앞에 자유러시아기(백청백기)를 들고 있는 인물이 미하일로바 아나스타시야(26)다. 사진 아나스타시야

전쟁 발발 당일 러시아에 있었나
2월 8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날 러시아에 갔다. 같은 달 24일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려 했는데 3시간 전 TV를 통해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 취소될까 봐 불안했고 너무 무서웠다. 아직도 생생하다. 공항으로 사람이 몰려왔는데 평소보다 3배 이상 많았다. 
가족들과 주변 지인 상황은 어떤가
이모부가 우크라이나인이고, 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러시아인인 어머니와 언니는 TV에서 나오는 말만 믿고 푸틴과 전쟁을 지지한다. 가족끼리 전쟁에 대한 생각이 달라 전쟁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안타깝고 슬프고 어이가 없다. 최근 러시아에서 예비군 동원령 내려진 이후 지인들도 연락이 끊겼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 대학 친구는 아르메니아로 갔다가 최근 들어왔는데 남편이 동원될까봐 또다시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 5일 오후 12시 아나스타시야가 서울 마포구 상암문화광장에서 화관을 쓰고, 자유러시아기(백청백기)를 몸에 두른 채 광장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함민정 기자

지난 5일 오후 12시 아나스타시야가 서울 마포구 상암문화광장에서 화관을 쓰고, 자유러시아기(백청백기)를 몸에 두른 채 광장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함민정 기자

“위협당하기도”…시위 멈추지 않는 이유

 아나스타시야는 지난 8월 홍대 인근에서 시위 도중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지하는 러시아 국적의 남성으로부터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만세’를 외쳐주는 이들의 응원으로 힘을 받을 때가 많다고 한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나면서 관심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시위를 계속 하고 있다. 전쟁은 빨리 끝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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