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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인간을 해롭게 하는 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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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

지난 10월 3일은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 고조선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다. 단군신화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홍익인간)’ 정치를 펼쳐 ‘이치에 맞게 돌아가는 세상(이화세계)’을 이루려는 휴머니즘 세계관을 일러준다. 그러나 개천절에 가을 매력으로 단장한 산천을 걷는 마음은 좀 침울했다. 찬란한 가을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서 ‘가을처럼 되어보자’는 바람에 못지않게 정치인에 대한 미운 생각이 일어서였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대추 한 알’, 장석주)의 인내와 의지로 세상을 풍성하게 하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푸르른 날’, 서정주)는 그리움을 데려오는 가을하늘 아래에서 누구를 혐오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보금자리를 폐허로 만들고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 푸틴의 만행을 막지 못하는 세계에서 사는 자괴감을 가을은 이해할 것이다.

폭력 멈추라 요구 묵살한 푸틴
인류 양식 깔아뭉개는 악한 힘
공동선 없는 힘은 흉기일 뿐
핵무기 사용은 인류 멸망케 해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프란치스코 교황도 3일 “무엇보다도 러시아 대통령에게 이 폭력과 죽음의 악순환을 멈추고 국민을 사랑해 줄 것을 간청하는 것입니다”며 호소했다. 푸틴은 크렘린궁에서 우크라이나의 국토를 병합하는 선언식 파티로 응답했다. 제정 러시아에서 헐벗은 노숙자들이 혹독한 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길가에서 얼어 죽어가는 데 귀족과 유한족은 따뜻한 건물 안에서 화려한 파티를 즐기던 모습이 떠오른다(영화 ‘닥터 지바고’). 러시아는 유혈혁명을 통해 그 모순의 시대를 끝내고 공산주의 국가의 시대를 열었다.

러시아에 혁명 같은 변화가 다시 주창된 건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 나서였다. 공산주의가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비효율과 무능력, 전체주의 체제와 국가폭력으로 인해 소련이 생기를 잃고 자생력을 상실하여 기진맥진한 시기였다. 개방을 의미하는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혁을 대변하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는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글라스노스트는 공산당과 최고 지도자를 선전 찬양하고 인민을 선동하며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성에서 벗어나는 ‘표현의 자유’에 물꼬를 텄다. 음지에 묻어두던 사실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양지로 나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비판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국가운영을 청산하고 민주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당직과 정부직 선거에  복수의 후보자를 허용하고 무기명 비밀투표제의 도입을 시도했다. 기술 현대화와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고 관료주의의 태만을 고치려고 했다. ‘소련 사회에 내재된 불합리, 불평등’ ‘아무런 양심과 책임의식도 없는 사람들이 나라의 권력을 차지하고 파벌과 연줄로 지배하는 것’에 대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사회와 당에 민주적인 원칙을 세우는 작업”이었다(『선택』, 미하일 고르바초프, 이기동 옮김). 주권국가의 민의를 존중하려는 그의 지혜와 결단이 없었다면 체코·헝가리·폴란드 등의 동유럽 민주화와 독일 통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야 했을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추모했듯이 고르바초프는 “한 명의 정치인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고, 수많은 사람에게 자유를 선사했다”(바이든 미국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무혈혁명은 좌절되었지만, 20세기 냉전을 종식시킨 그의 철학은 또다시 치열해지는 냉전의 시대에 큰 교훈이 될 것이다.

고르바초프를 보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개인과 정치의 선한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푸틴에게서는 인류의 양식을 깔아뭉개는 악한 힘을 느낀다. 최고 권력자들의 무소불위의 힘이 도처에서 치명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 힘이 보물인지 쓰레기인지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지, 널리 인간을 해롭게 하는지에 달려있다.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하는 공동선이 없는 힘은 흉기일 뿐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을 앗아가고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핵무기 사용을 위협하는 독재자들은 ‘널리 인간을 해롭게 하는 자’다.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