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파낸 北땅굴도 찾아낸다...스텔스도 잡는 '절대반지' [이철재의 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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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은 국가의 비밀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독일의 암호 기계인 에니그마(Enigma)를 해독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24시간마다 1590억의 10억 배나 되는 경우의 수가 만들어지는 에니그마의 암호 체계를 뚫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튜링과 그의 동료들은 결국 에니그마의 복호화(암호 해독)에 성공했다. 이는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양자의 특성을 이용한 양자 기술. iStock

양자의 특성을 이용한 양자 기술. iStock

저 멀리 태평양 전선. 일본군은 미군의 무전을 감청해 빼낸 정보를 바탕으로 전투를 치러 승리를 거두곤 했다. 그래서 미군은 원주민 부족인 나바호족에서 암호 통신병을 뽑았다. 그들만의 고유 언어로 통신을 주고받았다. 나바호 암호 통신병은 탱크는 나바호어의 ‘거북이’로, 폭격기는 ‘알을 밴 새’로, 기관총은 ‘재봉틀’로 따로 불렀다. 일본군이 이를 엿들어도 당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에니그마 복호화 프로젝트는 2014년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으로, 나바호족 암호 통신병의 활약상은 2002년 ‘윈드토커(Windtalkers)’로 각각 만들어졌다. 이들 영화는 전쟁에서 암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왼쪽)과 '윈드토커' 포스터. 다음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왼쪽)과 '윈드토커' 포스터. 다음

전 세계 군사 지휘부에겐 ‘이미테이션 게임’처럼 상대 암호를 가로채면서 ‘윈드토커’와 같이 아군 통신을 보호하는 게 꿈이다.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The Ring)로만 가능할 법한 일이다. 이를 끼면 자신을 숨기면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반지 말이다.

그런데 절대반지의 능력을 현실로 곧 볼 수 있게 됐다. 양자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양자 역학

우선 양자부터 알아보자. 양자(量子ㆍquantum)는 더는 쪼갤 수 없는 에너지의 최소량의 단위를 뜻한다. 1900년 독일의 막스 플랑크가 처음 도입한 개념이다. 20~30년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가 논쟁을 벌이면서 양자 역학이 상당 수준에 이르게 됐다.

양자의 개념과 물리적 특성. 국방기술진흥연구소

양자의 개념과 물리적 특성. 국방기술진흥연구소


※양자 역학은 물리학에서도 어려운 분야다. 문과 출신인 기자에게 외계어처럼 보이는 설명을 그대로 옮긴다.

양자는 네 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상태값이 0이나 1로 확정적이지 않고 동시에 공존하는 중첩성(superpostion) ▶상태값이 확률로서만 존재하는 불확정성 ▶측정하는 순간 0이나 1로 결정되고 확정된 이후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성 ▶두 양자쌍 간에 상관관계가 존재할 경우 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아도 한쪽의 상태가 다른 쪽의 상태를 결정하는 얽힘(entanglement) 등이다.

지난 4일(현지시간)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가 202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뽑은 알랭 아스페, 존 클라우저, 안톤 차일링거 등 3명은 양자 역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냈다.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안톤 차일링거 오스트리아 빈대학 교수. AFP=연합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안톤 차일링거 오스트리아 빈대학 교수. AFP=연합

노벨위원회는 “수상자들의 ‘양자 얽힘’ 실험은 양자 정보라는 새로운 기술을 열 수 있는 기반이 됐다”며 “양자 얽힘이 있는 광자 실험을 최초로 성공하고 벨 부등식 위배를 확인하는 연구를 통해 양자 암호와 양자 컴퓨팅 개발 등에 광범위하고 잠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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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의 양자 기술 패권 경쟁

양자는 오래전 제시된 개념이지만, 양자 역학을 현실로 구현할 기술이 나오지 않아 군 당국이 그동안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상황이 달라졌다.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허준 교수는 “반도체의 집적화가 진전되고 나노 테크놀로지가 나오면서 작은 에너지를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게 돼 양자 기술의 기반이 갖춰졌다”고 말했다.

2019년 10월 구글은 양자 컴퓨터 시커모어를 공개했다. 시커모어는 현재 슈퍼컴퓨터로 1만년이 걸리는 연산을 3분 20초 만에 해결했다는 게 구글의 설명이다. 2017년 6월 중국과학기술대학교는 고도 500㎞에 떠 있는 인공위성 모쯔(墨子)를 통해 암호가 담긴 광자를 칭하이(靑海)성 더링하(德令哈)에서 윈난(雲南)성 리장(麗江)까지 1203㎞를 순식간에 옮겼다.

 구글의 양자 컴퓨터 시커모어. 구글

구글의 양자 컴퓨터 시커모어. 구글

양자 컴퓨터는 기존 암호체계는 모두 무력화한다(‘이미테이션 게임’). 그리고 양자 통신은 도ㆍ감청이 불가능하다(‘윈드토커’). 이 같은 기술 발전을 그냥 지켜만 볼 군 당국이 아니다. 양자 기술에서 현존 무기체계의 성능 한계를 넘어서며, 적의 첨단기술을 쓸모없게 만드는 게임체인저로서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래서 현재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세계 강대국들은 양자 기술에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다. 양자 기술 패권 경쟁이 시작한 것이다.

적 스텔스 전투기도 바로 탐지해

양자 기술은 국방에선 크게 세 갈래(국방기술진흥연구소 ‘미래 전장 양상을 바꾸는 국방 양자기술 10선’)로 활용될 전망이다. 초신뢰 보안통신을 제공하는 양자 통신, 초고속 연산 기능을 제공하는 양자 컴퓨팅, 초정밀 계측ㆍ탐지 기능을 제공하는 양자 센서다.

양자 통신은 빛의 최소 단위인 광자(光子)에 정보를 실어 보내는 기술이다. 양자의 얽힘 현상을 이용하면 물질을 옮기지 않고서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한다. 양자 통신 스타트업 기업인 큐심플러스의 노광석 대표이사는 “양자 통신을 중계하는 위성을 해킹할 수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통신 중간에 도ㆍ감청됐다는 게 드러나기 때문에 해당 데이터를 버리면 된다”고 말했다.

중국의 YLC-8B 스텔스기 탐지 레이더. 탐지를 할 수 있어도, 조준이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양자 레이더는 이 같은 스텔스기 레이더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능을 갖췄다.

중국의 YLC-8B 스텔스기 탐지 레이더. 탐지를 할 수 있어도, 조준이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양자 레이더는 이 같은 스텔스기 레이더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능을 갖췄다.

군에선 유선ㆍ무선ㆍ위성으로 양자 통신을 이용할 수 있다. 통신 거리의 제한 없이 데이터 송ㆍ수신할 수 있는 양자 네트워크를 만든다면 전장의 복잡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다. SK와 KT와 같은 통신 대기업은 양자 통신의 상용화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컴퓨터가 0과 1의 비트(bit)로 데이터를 처리한다면, 양자 컴퓨터는 0이면서 동시에 1인 큐비트(qubit)로 처리한다. 연산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양자 컴퓨터는 인공지능에 적용될 것이며, 드론이나 무인차량과 같은 무인 전투체계에도 쓰일 것이다. 또 양자 컴퓨터는 적의 암호 체계를 뚫을 수 있다.

양자 컴퓨터의 창과 양자 통신의 방패 싸움에 대해 허준 교수는 “기존 암호 체계는 수학을 바탕으로 뒀고, 양자 통신은 양자 역학이 기반”이라며 “양자 컴퓨터로 양자 통신을 복호화할 순 없다”고 말했다. 양자 통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양자 센서는 광자쌍 중 하나는 표적으로 보내고 다른 하나는 양자 메모리에 보관한 뒤 수신한 광자들과의 양자 상관관계를 측정한다. 이를 레이더에 적용하면 최첨단 스텔스기도 단번에 잡아낼 수 있다. 양자 레이더에서 나가는 광자는 에너지 수준이 매우 낮아 적 스텔스기는 피탐 사실을 눈치챌 수 없다.

자기장 민감도가 높은 양자 자력계는 물 속이나 땅속 깊숙한 곳의 물체를 잡아낸다. 잠수함이나 기뢰는 물론 북한 땅굴도 탐지할 수 있다. 양자 자이로스코프는 적의 방해 전파로 GPS를 먹통으로 만들더라도 아군 타격무기를 정밀하게 유도한다.

양자 센서는 뇌의 미세 자기장도 읽을 수 있다. 앞으론 텔레파시처럼 말을 하지 않고도 상대방과 교신할 수 있는 사일런스 토크(Silence Talk)나 생각만으로 기계를 운전하고 조작하는 BMI(Brain Machine Interface)가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가 안보에 핵심인 첨단 기술

한국도 전 세계적 양자 기술 패권 경쟁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디지털을 넘어 퀀텀의 시대로’라는 양자 비전을 세워 범부처 차원에서 양자 기술 연구·개발 투자 전략을 마련했다. 2030년대까지 양자 기술 4대 강국에 진입하는 게 목표다.

조지아텍의 연구진이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지원을 받아 양자 컴퓨터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조지아텍

조지아텍의 연구진이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지원을 받아 양자 컴퓨터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조지아텍

합동참모본부는 ‘29~53 장기 무기체계 발전방향’에서 양자암호통신체계를 장기소요로 제시했다.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지난 8월 250m 거리를 양자 통신으로 송수신하는데 성공했다. 지난달엔 원자스핀 자이로스코프(양자 자이로스코프)의 기술을 확보했다. 양자 레이더는 한창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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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갈 길이 멀다. 허준 교수는 “양자 통신은 미국과 기술적으로 큰 차이가 없고, 양자 센서는 조금 뒤떨어졌으며, 양자 컴퓨팅은 한참 뒤처졌다”고 말했다. 산·학·연과 군이 힘을 합해 양자 기술에 역량을 집중할 필요성이 크다. 양자 기술과 같은 최첨단 기술은 경제적 파급효과를 낳지만, 안보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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