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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걷고 싶어지는 가을…도시생활자의 가을 미술관 사용법

중앙일보

입력

[퍼즐] 조성은의 도서 공간 이야기(6)  

운치가 더해지는 가을은 걷고 싶어진다. 걷다 보면 ‘봄볕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 딸을 내보낸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이 익어가는 가을의 매력도 보이고 자연이 주는 다채로운 계절감이 좋다. 도시생활자에게도 가을은 점심시간이라는 잠깐의 평일 낮 휴식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계절이다. 이럴 땐 아지트 같은 근처 갤러리 카페를 찾는다.

갤러리가 아지트가 된 것은 광화문 서점직원 시절부터다. 이때 성곡미술관은 나의 아지트였다. 미술관으로 입장해서 정원 속 작은 카페로 향한다. 커피 한잔 사서 들고 잘 가꿔진 정원을 따라 소요하며 새소리, 바람에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를 즐기며 걸었던 기억. 작은 정원이지만 여러 길이 있어 기분에 따라 루트도 바꾼다. 도시 직장인의 짧은 점심시간에 이보다 좋은 휴식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때부터 미술관의 쓰임은 바뀌기 시작했다.

파주 출판도시 옮겨서는 바로 앞에 있었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이 아지트가 되었다. 파주출판도시는 출판사들의 집적 지역으로 국내외 건축가들에게 의뢰해서 지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사옥들이 많아 건축과 학생들이 건물탐방을 오거나 모던한 도시 이미지의 광고의 한 장면으로 나오기도 한다. 미메스시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스커상을 수상한 세계적 건축가 알바루 시자가 디자인한 건물로 건축 의뢰 시 고양이 한 마리가 그려졌다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듯한 곡선의 부드러운 고양이를 닮은 거대한 흰색건물과 초록 잔디정원의 강렬한 대비가 만들어내는 산뜻한 청량감이 아름다운 공간이다. 여기서 생레몬을 갈아 넣은 레모네이드 한잔이란! 말이 필요 없는 휴식이다. 쾌적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미술관 카페는 휴식의 질을 한껏 높여준다는 것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부암동에 서점을 오픈하면서 나의 미팅이나 식사 장소는 삼청동 갤러리들이다. 특히 작품과 전망에 모던한 공간디자인까지 즐길 수 있는 국제갤러리의 더 레스토랑과 PKM 갤러리 뒤편에 있는 PKM가든 레스토랑&카페를 애정한다.

국제갤러리 더레스토랑 [사진 조성은]

국제갤러리 더레스토랑 [사진 조성은]

나에게 미술관은 전시를 보러 가는 곳이라 기보다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그야말로 다목적 공간이다. 인스타 속 핫플레이스의 유명 카페보다 미술관 카페가 좋은 이유는 수없이 많다.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의 예술과 휴식은 참으로 근사한 조합이라는 것을 보고 마시고 먹고 거닐면 알 수 있다.

유럽여행에서 도시 속 묘지를 만났을 때 흠칫 놀랐던 기억이 있다. 죽음이 터부 시 되지 않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도시의 문맥이 느껴졌다. 바쁜 도시 서울에서는 미술관이나 고궁이 이러한 완충공간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조용히 산책하며 생각할 수 있는, 영혼이 쉴 수 있는 공간. 또한 갤러리는 다양한 전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 현재와 현재의 시간을 연결하는 매개체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네나 일터가 바뀌거나 여행지에 가면 제일 먼저 근처에 미술관이 있는지 둘러보고, 그곳에 카페가 있는지 확인한다.

온양민속박물관 카페 [사진 조성은]

온양민속박물관 카페 [사진 조성은]

얼마 전 온양민속박물관에 갔는데 담백하고 차분한 공간감에 휴먼스케일이 녹아든 카페가 예뻤다. 앉아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창밖을 보니 뜰에서 결혼식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였는데 그 느낌이 소음처럼 들리지 않았다. 되려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삶과 연결된 활기가 더해져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최만린미술관 [사진 조성은]

최만린미술관 [사진 조성은]

가을 이맘때쯤 최만린 미술관에서 작업했던 ‘조각가의 서재’도 생각난다. 한국의 대표적 조각가 최만린이 30년간 거주했던 자택을 성북구에서 매입해 만든 구립미술관이다. 이곳 서재 북큐레이션을 의뢰받아 답사차 공간을 방문했는데, 주택가 한복판에 2층의 빨간 벽돌집이 무척 아름다웠다. 가을 햇빛이 벽돌과 작은 정원 그리고 조각에 스밀 때의 운치는 작은 미술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장소의 원형을 살려 역사성을 더했는데, 아담한 집에 대형 조각작품을 위한 높은 천고가 있는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조각가의 집은 이런 반전 매력이 있어 여행지에서 될 수 있으면 꼭 들른다.

최만린 미술관 개관전 북큐레이션 ‘조각가의 서재’ [사진 조성은]

최만린 미술관 개관전 북큐레이션 ‘조각가의 서재’ [사진 조성은]

북큐레이션을 위해 책을 정리해보니 선생의 작품집과 소장한 전시 도록만으로도 한국의 근현대 미술 작품집 컬렉션이 완성됐다. 책에 쓰인 사인과 손글씨를 보는 재미까지 더해져 작업하는 내내 즐거움에 푹 빠졌다. 시대순으로 창가 서가에서 천천히 살펴볼 수 있게 배치했다. 메인 서가는 한눈에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로댕부터 미디어아트까지 범위를 잡고 조각가의 계보도로 구성해서 관련 도서를 진열하고 별책부록처럼 작은 서가에는 예술가의 동네이니만큼 성북동의 작가들이 쓴 작품들을 따로 모아 코너를 만들었다. 작은 미술관 속 한 개의 방에 위치한 라이브러리지만 책을 통해 작가의 작품과 세계와의 연결을 경험하는 시간이기를 바랐다.

동네에 작고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박물관이나 미술관 있으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건물을 바라보는 것도 건물을 사용하는 것이다’는 건축가 정기용의 말을 좋아한다. 시각적인 커뮤니케이션도 건축물이 가진 중요한 요소임을 상징하는 말이라 좋다. 지역의 아름답게 잘 만들어진 미술관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러한 공간에 작지만 알찬 라이브러리도 함께 자리하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가을, 도시생활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온전한 산책을 위한 나만의 아지트를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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