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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을수 있게 해주세요...1만명 소원 들어준 '웰다잉 지킴이'

중앙일보

입력

“멜론 아이스크림을 보면 그 아이가 생각나요….”
 박명희(52) 간호사는 6년 전 봄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4살 민영이(가명·여)와 처음 만났다. 산소마스크를 쓴 아이는 “블루베리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 멜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이는 2014년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2년을 투병했지만, 상태는 더 나빠졌다. 딸의 고통을 더 보기 힘들었던 부모는 항암 치료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민영이는 호스피스 병동에 왔다.

 “천국에 가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떠나면 동생은 누가 돌볼까요?” 호스피스를 알진 못했지만, 민영이는 죽음이 임박한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박 간호사는 민영이가 죽음만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이가 겁먹지 않게 노란색 청진기를 준비했고 진료 때마다 산타처럼 선물을 건넸다. 주사를 놓아야 할 때면 “병원 놀이를 하자”며 안심시켰다.

 부모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담과 음악·미술 요법 등을 통해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이해하고 딸과의 이별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왔다. 노력 덕분이었을까. ‘항암 치료를 멈추면 한 달 정도밖에 살지 못할 것’이란 진단과 달리 민영이는 4개월 가까이 삶을 이어갔다. 상태가 호전됐을 땐 애국가 전곡을 외워 불러서 모두의 눈가를 적시기도 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16년 8월 어느 날 저녁. 민영이는 의료진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박 간호사는 “호스피스 병동엔 소아·청소년 환자가 적어 기억이 선명하다”며 “민영이는 호스피스 병동에 와서 기침도 줄고 비교적 편안하게 지내다가 떠났다”고 회고했다.

박명희 간호사. 사진 박명희

박명희 간호사. 사진 박명희

 박 간호사는 32년간 병상을 지킨 베테랑이다. 건축가를 꿈꾸다가 집안의 반대와 고등학교 담임교사의 추천으로 선택한 간호사 일은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다. 오래도록 암 환자 병동을 지킬 것 같던 그의 삶은 1996년 호스피스 완화치료 병동 근무를 자원하면서 달라졌다. “치료가 어려워진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덜 무너진 채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돕고 싶다”고 다짐한 결과였다.

지난해 12월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팀 박명희 간호사(왼쪽에서 세번째)가 성탄 축하 행사에서 의료진과 함께 병실을 돌며 선물 나눔을 하고 있다. 사진 서울성모병원

지난해 12월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팀 박명희 간호사(왼쪽에서 세번째)가 성탄 축하 행사에서 의료진과 함께 병실을 돌며 선물 나눔을 하고 있다. 사진 서울성모병원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와 그의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건 뜻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매일 죽음을 앞둔 환자를 만나 ‘잘 죽을 수 있게’ 도와야 했다. 국내에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널리 도입되기 전이었다. 인력이 부족했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호스피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보호자는 물론 환자 중에도 호스피스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걸 숨기는 이들이 많았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호스피스 완화치료를 택한 것 아니냐’는 주위 시선 때문이었다.

신참 간호사 때의 마음가짐으로 하나씩 부딪혀 익히다 보니 조금씩 눈이 뜨였다. 환자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대를 넓히니 라포(rapport·친밀감과 신뢰 관계)가 형성됐다. 환자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의사·의료사회복지사·자원봉사자로 이뤄진 호스피스 다학제 팀도 조금씩 단단해졌다.

2020년 5월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팀은 환자들을 위한 소원성취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환자 자녀들과 미리 생신 축하 파티를 열었다. 사진 서울성모병원

2020년 5월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팀은 환자들을 위한 소원성취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환자 자녀들과 미리 생신 축하 파티를 열었다. 사진 서울성모병원

지난달 박 간호사는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팀장이 됐다. 20여년간 호스피스 병동에서 그의 손을 거쳐 간 환자는 어느덧 1만명을 넘어섰다. 그 사이 10개였던 병상은 23개로 늘었고 자원봉사자를 포함해 30여명이던 인력도 75명이 됐다. 그러나 박 간호사는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엔 매년 환자 700여명이 입원한다. 대기자가 수십 명이다 보니 입원 연락을 할 때쯤엔 환자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때마다 듣는 환자 가족의 원망에 박 간호사는 가슴이 쓰렸다고 했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6%만 호스피스 완화치료를 이용해요. 나머지 분들의 죽음의 질은 어떨까 하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어요.”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 병동에서 의료진이 회진을 하며 환자 상태를 살피고 있다. 사진 서울성모병원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 병동에서 의료진이 회진을 하며 환자 상태를 살피고 있다. 사진 서울성모병원

그는 모든 의료인이 호스피스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팀이 임종을 앞둔 모든 환자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의료시스템 안에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엔 생로병사가 있어요. 생명의 시작엔 기꺼이 함께하며 기쁨을 나누지만, 마지막 순간의 슬픔엔 함께하길 꺼리곤 해요. 죽음이 두렵고 멀리하고 싶은 존재지만 피할 수 없잖아요. 나와 주위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미리 죽음과 가까이 있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달란트를 나눴으면 해요.” 8일 10번째 호스피스의 날을 맞은 '웰다잉 지킴이'의 간절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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