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인류 진화에서 불과 언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를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기 때문이다.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인류는 추위를 이길 수 있었고, 굽고 익혀 먹을 수 있어 세균의 공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으며, 많이 씹지 않아도 쉽게 소화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턱뼈가 줄어들면서 언어 사용이 수월해지는 연쇄작용까지 일어났다. 오늘날 인류를 있게 한 핵심 요인인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불과 언어 사용을 인간만의 능력이라고 해왔는데, 1990년대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증거가 제시됐다. 칸지(Kanzi)라는 이름의 보노보(일명 피그미침팬지)들이 렉시그램(lexigram)이라는 일종의 그림문자로 인간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미국 조지아 주립대 언어연구소 수 세비지 럼보 박사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보노보는 우리 인간과 가깝다는 침팬지보다 좀 더 우리와 비슷한 면이 많은 영장류다.
칸지는 뛰어난 능력 덕분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는데, 발성구조 때문에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렉시그램으로 소통할 수 있는 단어가 3000개나 되고, 석기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초기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돌을 깨뜨려 박편(剝片)을 만들고 그것으로 끈을 잘랐다. 사진가가 어떤 포즈를 취하도록 유도하면 동물답지 않게 빠르게 그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냥으로 불을 피우고, 그 불에 음식을 꿰어 구워 먹는다. 사용한 뒤에는 물을 뿌려 불을 끄고 말이다. 어린아이 수준이지만 인간만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들을 칸지가 했다.
재미있는 건 이 ‘천재 유인원’이 말하지 않는 단어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주 많이, 그리고 흔히 사용하는데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단어가 있다. ‘왜?’(Why)가 그것이다. 칸지는 필요한 것들을 능숙하게 요구하고 사용하면서도 ‘왜?’라고 하지 않았다. 인간의 아이들은 자라면서 귀찮고 짜증날 정도로 ‘왜?’라고 하는데, 칸지는 그러지 않았다. 한 마디로 호기심이 없었다. 호기심이 없으니 세상을 해설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해설이란 자기 방식으로 상황을 해석해야 가능한 행동이다.
우리는 ‘왜’를 흔하게 사용하기에 그런가 싶지만 이건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게 왜 그렇지?”라는 질문에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걸 있게 한 어떤 원인이나 영향을 끼친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물은 보이는 것만으로 세상을 판단하지만, 인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인과관계 같은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안다. 추상적인 것까지 포괄하는 이런 능력이 있기에 인간은 세상을 훨씬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만이 가진 이 능력을 모든 인간이 완전히 장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잘 사용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일본의 강소기업들에겐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왜’의 일상화다. 스스로 끊임없이 ‘왜’를 해가며 답을 찾아낸다. 세계적인 기업 도요타는 문제가 생기면 ‘왜’를 여섯 번씩 하라고 하기까지 한다. 끈덕지게 ‘왜’를 하다 보면 근본적인 원인이나 최선의 방법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도요타 방식이 유행일 때, 이 도요타 관계자가 국내 기업 관계자에게 했다는 말이 있다. “당신들은 ‘왜’를 (우리보다) 절반도 안 하는 것 같다.” 실력 차이가 여기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유럽의 중세는 암흑시대로 불린다. ‘왜?’라고 묻는 걸 죄악시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조차 “신은 꼬치꼬치 따져 묻는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마련했다”고 했을 정도다. 모르는 것을 묻지 못하게 하니 발전이 있을 리 없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왜’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권위에 도전하는 단어였을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방향이 주어진 상황에서는 ‘왜’보다 빨리 추구해야 할 ‘무엇’이 더 중요할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더구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시대이기에 이제는 ‘무엇’보다 ‘왜’가 필요하다. ‘왜’를 통해 잘못을 찾아내고 교정하면 제대로 된 방향을 찾을 수 있고 효과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까닭이다. 눈앞에 있는 적보다는 싸워야 할 이유가 있는 적이 진짜 적이듯, 길이라고 다 길이 아니다. 가야 할 이유가 있어야 제대로 된 길이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인간답게 “왜왜왜왜왜왜…”라고 물어야 더 나은 미래로 갈 수 있다. 택시 멸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제가 되고 있는 택시 대란이 왜 일어났는지, 대학들은 왜 자꾸 뭔가를 숨기는 듯 이상한 말들을 하는지. 이 때문에 우리가 보이지 않게 치르고 있거나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얼마나 되고, 이것들이 우리의 성장을 얼마나 가로막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araseo11@naver.com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2005년부터 자연의 생존 전략을 연구하며 지속 가능한 생명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를 탐구하고 있다.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등의 책을 냈고,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지식탐정의 호시탐탐’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