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6〉
1945년 초 만주(동북) 각지에 포진된 일본의 ‘만·몽개척단(滿·蒙開拓團)’은 860여개, 33만명 내외였다. 만주국 연구자들은 개척단 구성원을 초전사(鍬戰士), ‘가래를 든 전사’라고 불렀다. 가래 외에 총도 지참한 군민합일(軍民合一)의 민병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소지한 총의 용도는 중국인의 반항 진압과 소련군이 만주에 진입했을 경우 두 가지였다.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부녀자와 아동들도 메이지 38년(1905년) 일본이 개발한 38식 장총과 죽창 들고 소련 정규군에 맞설 준비를 했다. 일본 관동군과 대기업의 거점은 중요 도시와 항구 외에 철도 주변이었다. 초부대(鍬部隊)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개척단은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범위를 농촌까지 확대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개척단원 군 징집 탓 남자 씨가 말라
1945년 8월 중순, 일본 패전 소식에 만주의 일본개척단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1972년 중·일 수교후 40년 전 남편 따라 북만주에 개척단으로 참여한 야마가타(山形)현 출신 일본 여인이 당시를 증언했다. 워낙 생생하기에 간추려 인용한다. “1932년 남편 따라 만주로 갔다. 8월이 되자 전세가 불리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루는 부락장(部落長)이 한 가구당 가마니 20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1년 전부터 정부는 개척단원의 군 징집 면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만주 벌판에 야생화가 만발할 무렵, 남편도 다른 단원들과 군가 부르며 전쟁터로 떠났다. 우리 개척단은 다른 개척단에 비해 징집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하루아침에 남자들의 씨가 말라버렸다. 부락에 남자라곤 부락장과 말더듬이 중국인 심부름꾼 1명이 다였다. 부녀자들은 새벽부터 들에 나가 풀을 벴다. 해가 지면 손으로 가마니를 짰다. 8월 15일 정오 부락장이 부락민을 집합시켰다. 개척단 본부의 중요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일본이 투항했다. 개척단원들은 만주에서 철수한다. 하얼빈(哈爾賓)에 집결해 일본으로 간다. 언제 소련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출발을 서둘러라.’ 평소 머저리 취급받던 심부름꾼은 그날따라 멀쩡했다. 꼭 이럴 줄 알았다며 히죽거렸다. 부락장에게 얻어맞고 도망가면서도 계속 낄낄거렸다. 생각지도 않았던 돌발사태에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도 남들처럼 집으로 달려가 짐을 꾸렸다. 간편한 옷과 3일 치 마른 식량 외에 성냥 몇 갑이 다였다. 어린 딸 손 잡고 개척단 본부에 집합했다. 개척단 단장과 부락장이 우리를 인솔했다. 큰길은 피하고 꼬불꼬불한 길을 골라가며 하얼빈으로 향했다.” 평소 개척단을 비호하던 관동군과 헌병들은 종적이 묘연했다.
중국인의 보복이 두려운 일부 개척단에 집단살상이 벌어졌다. 8월 18일 오후 화촨(樺川)현에서 인간 지옥이 벌어졌다. 화촨 개척단 단장과 일본군 헌병이 개척단원 1600명을 20개 방에 집합시킨 후 건물에 경유를 뿌렸다. 화염방사기가 불을 토하고 기관총 소리가 요란했다. 수류탄이 작렬하고 박격포도 쉴 틈이 없었다. 거의 전원이 몰살했다. 죽기가 힘들었던지 몇 명이 목숨을 건졌지만 사람 몰골은 아니었다.
하얼빈으로 향하던 개척단의 중간 집결지 팡정현(方正縣)에서도 비극이 벌어졌다. 토박이 노인이 구술을 남겼다. “1945년 8월 중순 두고두고 본 것이 후회되는 참혹한 현장을 목도했다. 한참 밥을 먹던 중 귀신소굴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개척단 본부를 귀신소굴이라고 불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먹는 것보다 구경 다니기를 더 즐겼다. 수저 내려놓고 귀신소굴을 향해 냅다 뛰었다. 입구에 지키는 사람도 없고, 마을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문틈으로 몰래 들여다보니 집집마다 여자 시신이 있었다. 산 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은 무섭지 않다는 할아버지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에게 야단만 맞던 할아버지 말이라 믿지 않았지만 그날따라 할아버지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문이 반쯤 열려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정갈한 일본 전통복장에 화장까지 한 예쁜 여인 두 명이 누워있었다. 뒷머리와 베개에 선혈이 낭자했다. 서로가 서로를 쏴 죽였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울컥했다. 철이 들면서 친구들에게 전쟁의 진짜 피해자는 일본 국민이라는 말 했다가 미친놈은 기본이고 몰매 맞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일본 국민을 만주에 와있던 일본 여인들이라고 바꿔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그날 82명이 총격이나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지금도 그날 생각만 하면 술에 의지하고 밤잠을 설친다.”
일 이민·개척단은 가해자이자 피해자
헤이룽장(黑龍江)성 팡정현은 하얼빈과 자무스(佳木斯) 사이에 있는 인구 22만 규모의 작은 현이었다. 개척단원이 다른 지역에 비해 적고 행패도 심하지 않았다. 일본 패망 후 귀국을 원하는 일본 개척단이 몰려오는 바람에 유명세를 치렀다. 통계에 의하면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일본개척단 1만명이 걸어서 팡정까지 왔다. 그 중 5000명 이상이 도착 후 기아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른 경로로 온 민간인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팡정현 정부는 도망 온 개척단원들을 냉대하지 않았다. 수용하기 위해 현지인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일부는 일본인 고아들을 직접 키웠다. 오갈 곳 없는 일본 여인과 가정을 꾸민 사람도 970명이었다. 일본 남자와 정식으로 결혼한 중국 여자도 300명이 넘었다. 자기들끼리 부부 비슷한 사이로 발전한 경우는 더 많았다.
만주 전역에 일본이 파견한 개척단과 농업이민은 30만명에서 33만명 정도였다. 사망자와 전쟁 막바지에 군대에 끌려가 소련군에 포로가 됐거나 행방불명 된 사람 외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간 개척단원은 농업이민자를 포함해 11만명 내외였다.
일본 이민과 개척단은 일본 침략정책의 도구였다. 중국인에게 재난을 안겨준 가해자(加害者)이며 일본 침략 전쟁의 수해자(受害者)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