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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 3명 중 1명 폭력 행사, 사회적 감시·제재 강화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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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호 28면

러브에이징

제니퍼 린치 감독의 ‘Boxing Helena(상자에 갇힌 헬레나)’는 유능한 외과 의사 닉(줄리안 샌즈 분)이 매력적인 간호사 헬레나(쉐릴린 펜 분)에게 병적인 집착과 소유욕을 보이는 영화다. 닉의 구애를 단호하게 거절한 헬레나는 불행히도 닉의 집 앞에서 교통사고가 난다. 닉은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옮긴 후 양다리를 절단하고 돌본다. 분노한 헬레나는 그를 계속 거부했고 닉은 그녀의 두 팔마저 제거한다. 몸통만 남아 혼자서는 생존이 힘들어진 헬레나는 자신을 돌보는 닉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다 말미에 돌연 지금까지의 스토리가 꿈으로 묘사되면서 영화는 다소 황당하게 끝난다. 하지만 훨씬 더 당혹스러운 점은 1993년 국내 개봉 당시 제목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였다는 사실이다. 비록 꿈으로 희석되기는 했어도 자신을 거부하는 여성을 소유하려고 사지를 절단하는 스토커의 악행을 인간의 가장 고귀한 감정인 ‘사랑’〈표 참조〉으로 표현하다니!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여성 15%, 남성 6% 스토킹 경험

언어적 표현은 그 사회의 정서와 시대상을 반영한다. 29년 전 스토커의 광적인 집착과 잔혹함을 사랑에 빠진 남자의 행동으로 표현했듯, 지난달 14일 발생한 신당동 역무원의 참혹한 스토킹 살인도 서울시의원에 의해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가해자가) 폭력적인 대응을 한 것 같다”고 평가되었다. 논란이 확산되자 시의원은 “경솔한 발언이었다”며 사과했지만 우리 사회에 상존하는 스토킹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스토킹은 상대방 의사에 반해 집요하게 추적하고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 행위다. 처음에는 문자·이메일·전화 등으로 계속 연락하고 선물을 주는 식의 구애 형식을 취하지만 차츰 미행, 감시, 불시 등장 등으로 이어진다. 스토커는 상대방이 거절하면 폭력이나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가족과 친구도 위협 대상이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혼자 가슴앓이하는 짝사랑과 달리 스토커는 상대방을 ‘물건’처럼 탐내면서 소유욕을 보이다가 좌절되면 파괴한다.

미국의 분석 자료에 의하면 스토킹은 여성의 약 15%, 남성의 약 6%가 평생 한 번은 경험할 정도로 흔하다. 피해자는 스타처럼 낯선 관계에서도 발생하지만 지인, 헤어진 연인이나 배우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스토킹 피해를 막기 위해 선진국은 1990년대부터 강력한 형사 처벌을 한다.

필자는 24년 전 이시형 박사(당시 성균관대 의대 정신과학 교수)의 조언을 받아 국내 최초로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스토킹의 실체와 위험성을 보도했다(1998년 2월 3일자 26면). 당시에도 구애→위협→폭력의 수순을 밟는 스토킹 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하려면 심신 치료뿐 아니라 안전을 지켜줄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2013년 3월부터 겨우 경범죄 처벌만 가능해졌고 불완전한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 건 23년 후인 작년 10월이다. 물론 그동안 스토커들에 의한 폭행·상해·강간·살해 등은 수시로 발생했고 피해자는 양산됐다.

외국 통계를 보면 스토커 3명 중 한 명은 살인을 포함한 신체적 폭력을 행사한다. 국내 통계도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 2013년부터 7년간 스토킹 판결을 받은 148건의 가해자 중 35.8%(53건)가 신체적 폭력을 행사했다. 대한민국이 스토킹 범죄에 대해 왜 그토록 관대한지, 1999년 발의된 스토킹 처벌법은 왜 20년 이상 폐기와 계류를 반복했는지 이해하기 힘든 이유다. 스토킹은 가해자 80%가 남성이지만 20%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누구나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다.

인간의 폭력성은 출생 시 타고나는 생존본능이다. 일생에서 가장 폭력적인 시기도 걸음마로 이동의 자유를 얻은 두 돌 무렵이다. 이 시기 아이는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느끼면서 매사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좌절과 분노가 쌓이면서 고함, 떼쓰기, 물건 던지기, 발차기 등 폭력을 행사한다. 이렇듯 인간은 배운 적도 없는 폭력을 아기 때부터 사용한다. 따라서 공동체 폭력을 줄이려면 교육과 제도를 통해 지속적인 폭력 억제법을 배우고 정착시켜야 한다. 소아과학 교과서도 폭력성을 억제하는 훈육은 두 돌 즈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적시한다.

인간이 폭력을 휘두르는 목적은 착취·권력욕·복수심·가학성·이념 등 다양하다. 어떤 경우건 자신의 정신적·물질적 만족을 위해서다. 상대를 좋아해서, 혹은 훈육을 목적으로 사용하는 폭력은 없다.

진화생물학적으로 사피엔스는 포유류 중에서도 가장 폭력적인 종이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순간에도, 자녀 출산을 위한 경쟁 상황이 아닌데도 폭력을 휘두른다. 인류학자인 파스칼 피크는 『원숭이는 인간의 형제인가?』라는 책에서 유인원 중에서도 인간만이 단지 폭력을 목적으로 강간을 저지르는 부끄러운 속성을 가졌다고 밝힌다. 참고로 동물의 성관계는 대부분 상호 합의하에 일어나며 드물게 발생하는 강간도 2세 출산이 목적이다.

구애→위협→폭력 수순 밟아

물론 평상시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폭력성을 억제하며 극소수만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사회가 혼란해지면 비폭력적이던 사람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폭력에 대해서는 일관된 사회적 감시와 제재가 필요하다.

불행히도 현대 의학은 스토커, 반사회적 인격장애자, 소아성애자, 소시오패스 등 폭력 범죄 성향이 높은 사람들을 진단만 할 뿐 행동을 교정할 치료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사석에서 그들의 범죄 예방은 병원 치료보다 법적인 제재가 훨씬 효과적이라고 들려준다. 지금이라도 권력자들이 범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전문가들의 현실적 조언에 귀를 기울여줬으면 좋겠다.

황세희 연세암병원 암지식정보센터 진료교수.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MIT에서 연수했다. 1994년부터 16년간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황세희 박사에게 물어보세요’ ‘황세희의 남자 읽기’ 등 다수의 칼럼을 연재했다. 2010년부터 12년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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