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장혜수의 카운터어택

말도 잘하는 선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콘텐트제작에디터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혜성처럼 등장한 최영미 시인은 잘 알려진 축구 팬이다. 축구 관련 글도 많이 썼다. 주로 산문이지만, 역시 시인답게 시도 썼다. 축구로 시를 썼다니 궁금하지 않은가. 최 시인이 2005년 펴낸 시집 『돼지들에게』에 축구를 소재로 한 시가 몇 편 있다. 그중 하나가 ‘공은 기다리는 곳에서 오지 않는다’는 다음 시다.

‘알제리 대학의 골키퍼였던 카뮈에게 ‘공’은/ 몸을 던져 막을 무엇이었고,/ 후보 선수인 내게 공은/ 어떻게든 만지고픈 무엇이었다./ 공은 그가 기다리는 곳에서 오지 않았다./ 그가 보지 못한 뒤에서 날아온 공이 그를 쓰러뜨렸고,/ 내가 기대하지 않던 친구의 도움이 나를 살렸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공이 오고 가며 게임이 완성된다.’

레스터시티전에서 슛하는 손흥민. [로이터=연합뉴스]

레스터시티전에서 슛하는 손흥민. [로이터=연합뉴스]

카뮈. 바로 그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다. 식민지 시절의 알제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잠깐 축구선수로 뛰었다. 라싱위니베르시테르알제(RUA) 주니어팀의, 앞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골키퍼였다. 일찍 그만뒀지만, 선수를 했던 경험 덕분에 카뮈는 축구사에 빛나는 명언 하나를 남길 수 있었다. “공은 기다리는 방향에서 절대 오지 않는다.” 골키퍼였기에 더욱 그리 느꼈을 거다. 이 명언은 최 시인 시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1915년 미국 작가 앨버트 하버드는 왜소증 배우 마셜 와일드의 부고 기사를 썼다. 신체의 한계를 극복한 점을 높이 기려 “그는 운명이 준 레몬을 집어 들어 레모네이드 가판대를 열었다”고 썼다. 멋진 비유다. 많은 이가 이 표현을 가져다 썼는데, 세계적인 자기계발서 작가 데일 카네기는 이렇게 변주해서 썼다. “레몬이 있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 이 명언과 스포츠가 딱히 연결될 만한 게 있을까 싶은데, 최근 멋진 연결고리 하나가 생겼다.

지난달 18일 토트넘 홋스퍼 손흥민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레스터시티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지난 시즌 EPL 득점왕인 그는 새 시즌 개막 후 이 경기 전까지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속이 얼마나 탔겠나. 그는 해트트릭 후에 이렇게 말했다. “삶이 우리에게 레몬을 건네면, 해트트릭을 하면 된다.” 단비 같은 골뿐만 아니라, 주옥같은 말까지. 명언 대결이었다면 카뮈가 울고 갔을 정도다.

손흥민은 말을 참 잘한다. 하나 더 소개한다면 자서전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에 나오는 이 말이다. “어제 값을 치른 대가를 오늘 받고, 내일 받을 대가를 위해서 오늘 먼저 값을 치른다. 인생에 후불은 없다.” 어떤가. 이 정도면 어록을 만들 만하지 않나. 현장에서 많은 선수를 인터뷰했다. 대화를 그대로만 옮겨도 기사가 될 때가 있지만, 아무리 찾아도 딱히 건질 말이 없을 때도 있다. 그래서인데, 사랑한다, 운동만큼 말도 잘하는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