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이라도 없었으면….”
‘세계한인의 날’인 5일 김 발레리아(61·여)는 수강 소감을 묻는 말에 답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고려인 학교를 운영하는 그는 이번 달 초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제41회 세종문화상(문화 다양성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대통령 명의로 수여되는 표창장엔 ‘문화 다양성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된다’는 내용이 적혔다.
지난 5월 주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영사관은 김 발레리아를 세종문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아리랑 예술단과 고려인 민족학교를 만들어 한국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는 이유였다. 문체부는 전문가심사위원회와 공적심사위원회를 거쳐 김 발레리아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표창장과 함께 상금 3000만원을 받게 됐지만 김 발레리아의 표정은 어두웠다. 세금을 제한 상금 모두를 학교 건물 1년 임차료 240만 루블(한화 약 5827만원)에 투입해도 모자랄 만큼 재정난을 겪고 있어서다. 김 발레리아는“하늘길이 막혀서 한국의 시상식은 못 가지만 상금은 받아서 다행”이라며 “당장 건물을 뺄 위기는 막았지만 앞으로가 문제”라고 말했다.
우수리스크 유일한 고려인 학교
고려인 민족학교는 우수리스크에 있는 유일한 한국어·문화 교육기관이다. 고려인 민족문화자치위원회 출신인 김 발레리아가 2019년 최재형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 우수리스크엔 고려인 약 1만 6000명이 거주한다. 전체 주민 10%가 고려인이지만, 한국 교육원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달리 한국어·문화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없었다. 이 사실이 안타까웠던 김 발레리아는 2019년 5월 우수리스크의 한 건물을 계약했다.
기념사업회와 업무협약을 맺고 있던 인천시교육청이 운영비로 3000만원을 지원한 데 이어 동아시아 청소년 역사기행 등 탐방 행사를 열었다. 전북도는 실내 인테리어 비용을 지원했고 경기도는 도서를 제공했다. 2019년 9월 5개의 교실과 공연홀· 무대의상실 등을 갖춘 고려인 민족학교가 문을 열었다.
그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위기가 왔다. 역사탐방, 아리랑 무용단 공연 등이 제한되면서 수입이 끊겼다. 학교 내 유치원을 세워 유치원 30여명에게 개인당 1만 5000루블(한화 36만원)을 유치원비로 받으면서 간신히 건물 잔금을 치뤘지만 지난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물가가 폭등했다. 전쟁 전엔 1000루블(한화 2만 4160원)이면 살 수 있던 쌀 10㎏ 값이 약 3000루블로 뛰었다. 해외수입이 제한되면서 우수리스크 내 소시지 공장 등이 문을 닫았고 파산하는 개인 사업자도 늘었다고 한다. 생계 곤란을 견디다 못해 우수리스크를 떠나거나 아이들의 학업을 포기하는 부모가 늘면서 올해 초 150여명이었던 고려인 민족학교 학생은 반년 사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최근 예비군을 대상으로 한 부분 동원령까지 내려지면서 우수리스크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한국 지자체의 지원도 끊긴 데다가 우수리스크의 전반적인 상황도 계속 어려운 탓에 기댈 수 있는 곳이 없다”라고 김 발레리아는 전했다.
최근 고려인민족학교 정문엔 러시아어 안내문이 붙었다. 매년 초 1년 치 임차료를 지불하는 방식을 월세로 바꿔 달라고 요청하자 건물주가 새로운 입주자를 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안내문이 붙은 뒤론 학생들도 불안해하고 “학교가 문 닫느냐”고 묻는 학부모도 늘었다고 한다. 김 발레리아는 “계속 상황이 안 좋지만, 아직 저를 믿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많다. 어렵게 만든 학교인 만큼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