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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슬픈 진실: ‘마법의 물약’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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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 초기에 중앙일보 논설실 회의의 단골 주제 중 하나는 ‘소득 주도 성장’이었다. ‘임금 인상→가처분 소득 증가→소비 진작→경제 활성화→경제 성장’이라는 가설의 허황함을 비판하는 말이 많았다. 경제 담당 논설위원들이 성토 1열에 있었다.

실패한 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 #위기 부른 영국의 '감세 주도 성장' #모두 허황된 '아브라카다브라' 주문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 AFP=연합뉴스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 AFP=연합뉴스

그들의 말이 이성적으로 100% 옳았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혹시 맞을 수도 있잖아?’라는 희망적 사고가 존재했다. 기자들도 임금 생활인이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경제가 좋아지기만 한다면 수단의 적절성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는 기적을 창조한다는 한국인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왜 널리 사용되지 않았을까’에 생각이 미치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임금 인상이 경제를 살린다면 그렇게 좋은 길을 마다할 나라가 없었을 것이고, 그 처방을 주장한 이는 노벨 경제학상과 평화상을 받았어야 한다. “한번 잡숴 봐”라며 꼬시는 약장수가 그토록 신통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먼지 날리는 길거리에서 목이 쉬도록 떠들 리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과는 처참했다. 일자리가 줄었고, 양극화도 오히려 심화했다.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무수히 날아갔고, (주휴 수당을 주지 않아도 되는) 주 15시간 이내 고용이 늘었다. 하루 서너 시간짜리 최저임금 직원에게 ‘뽕을 뽑겠다’는 식으로 쉴 새 없이 고된 일을 시키는 업주가 많아졌다. 좀 편한 일은 키오스크 기계와 서빙 로봇이 대신 하게 됐다. 사용자를 탓하기도 어렵다. 그들도 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이다. 만병통치라고 해서 열심히 먹은 약이 몸 곳곳에 독소를 뿌리고 노화를 촉진한 꼴이다.

지난주에 영국 정부가 벼랑 끝을 보고 왔다. 리즈 트러스 총리가 감세 계획을 발표하자 파운드화의 가치가 폭락하고 국채 금리가 치솟았다. 주택 구입 대출이 중단되기도 했다. 1976년처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집권당에서도 총리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감세 방안은 최고 소득세율 45%를 40%로 낮추고(연 소득 2억4000만원 이상) 그 아래 구간의 세율도 조정하는 것이었다. 트러스 총리는 ‘감세→가처분 소득 증가→소비 진작→경제 활성화→경제성장’을 주장했다(감세를 임금 인상으로 바꾸면 소득 주도 성장과 구조가 똑같다).

그런데 소득세율 45% 해당자가 몰려 있는 런던의 금융가에서 파운드화를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금융자본의 이해에 충실한 그들은 ‘감세→재정 적자 확대→파운드화 가치 추락→경제 위기’로 미래를 진단했다. 취임 한 달 만에 실각 위기에 몰린 트러스 총리는 지난 3일(현지시간) 감세안을 철회했다.

감세는 보수당 정체성의 핵심이다. 예전에도 늘 썼던 카드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융 발작을 불렀다. 감세안에 따라붙었던 공공 부문 인원·예산 감축, 복지 시스템 정비 등의 재정 긴축 방안이 제시되지 않은 게 과거와 달랐다. 국가 부채 증가가 얼마나 예민한 문제인지를 보여준다. 지난 한국 대선 때 이재명 후보는 “우리도 곧 기축통화국이 된다”며 재정 적자 걱정을 기우로 치부했다. 영국은 진짜 기축통화국인데도 이런 일을 겪는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감세가 경제성장을 부른다는 트러스 말은 마법사가 ‘아브라카다브라’ 주문을 외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임금 인상이 경제를 살린다는 말도 다르지 않다. 울프는 경제에 ‘마법의 물약(magic potion)’은 없다고 했다. 그는 사람과 기술에 투자, 국민의 저축, 개방적 경제,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한 정책, 이웃과의 분쟁 해결이 진정한 성장 동력이라고 칼럼에 썼다. 이상한 약 찾지 말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운동 열심히 하란다. 우리는 어떤가. 반도체 인력 육성을 위한 법안이 잠들어 있는 국회에서 복지 지출 확대는 무사통과다. 여기엔 여야가 별반 다르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