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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핵 버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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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형수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형수 국제팀 기자

박형수 국제팀 기자

“과거 미국은 일본에 두 차례 핵무기를 사용한 선례를 남겼다. 서방은 민주주의를 논할 자격이 없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네츠크·루한스크·자포리자·헤르손 등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을 러시아 영토로 병합한다고 선언하며 외친 일성이다. 이어 우크라이나를 향해 “모든 군사 행동과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라”고 호통쳤다.

푸틴이 언급한 선례란 2차 대전 중이던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한 핵탄을 의미한다. 당시 핵탄의 압도적 위력은 두 도시를 생지옥으로 만들고, 결사항전을 외치던 ‘대일본제국’을 무조건 항복하게 했다. 현재 러시아가 보유한 전술핵의 위력은 일본에 투하된 핵탄의 수 배~수십 배다. 전술핵 비축량은 2000개로, 미국보다 10배 많다.

러시아의 핵무장은 막강하지만, 핵 버튼 통제 장치와 절차는 미미하다. 전략핵은 대통령·국방장관·총참모장 중 두 명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정도의 통제 절차가 있지만, 전술핵은 이마저도 불분명하다. 푸틴은 ‘핵 독트린’도 미리 손봐뒀다. 원래 ‘핵 공격을 받았을 때’ 뿐이던 핵무기 발사 조건에, 2000년 ‘재래식 무기 공격으로 국가 안보가 위태로울 때’, 2020년엔 ‘국가 존립이 위협받을 때’ 등을 추가했다. 핵 버튼을 통제할 제도적 장치를 겹겹이 만들어둔 미국·프랑스 등과 러시아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통제력을 잃은 푸틴의 반복적인 핵 위협에, 일각에선 자칫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미국·러시아 간 군사충돌 가능성도 제기한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은 그의 독단을 견제할 집단 지도부가 있었지만, 푸틴에겐 그를 제지할 힘 있는 측근이 없다”고 지적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책 『결정의 본질』 저자 그레이엄 엘리슨은 “지도자가 재앙적인 굴욕과 성공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순간, 핵 공격 시나리오가 작동할 수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전했다. 푸틴에게 선택의 순간은 ‘우크라이나군이 점령지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낸 때’라고 내다봤다. 그간 푸틴의 선택은 침공-동원령-병합 등 악수로 점철됐다. 마지막 남은 선택의 기회엔 핵 버튼이 아닌 ‘패전 인정’을 택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