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재산압류 중인데 국선 선임 안해준 재판부...대법원 "위법"

중앙일보

입력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뉴스1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뉴스1

1심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의 재산이 압류된 사실 등이 드러났는데도 2심 재판부가 국선변호인을 선정하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도로교통법 위반 등 혐의를 받는 A씨에 대한 원심판결을 파기해 환송한다고 5일 밝혔다.

배달업에 종사하는 A씨는 지난 2021년 4월 평택시의 한 교차로에서 신호를 위반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맞은편에서 오던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A씨는 피해 차량 운전자에게 가짜 전화번호를 알려주고는 "음식 배달을 하고 오겠다"며 현장을 떠났다. 피해자는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고 승용차 수리비는 85만원 상당이 나왔는데, A씨는 피해 상황을 확인하거나 자신의 인적사항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검찰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도주치상)죄, 도로교통법위반(사고후 미조치)죄로 보고 기소했다. A씨가 운전하던 오토바이는 의무보험도 들어있지 않아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위반 혐의도 적용됐다.

1심 재판부는 지난 1월 모든 혐의를 인정해 A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준법운전강의 수강명령을 내렸다. A씨는 형이 너무 무겁다는 이유 등을 들어 항소했다.

1심에서 국선변호인의 도움을 받았던 A씨는 2심 재판부에도 국선변호인을 선정해달라고 청구했다. 형사소송법상 법원은 피고인이 빈곤 등의 이유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는 경우에 피고인의 청구에 따라 변호인을 선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첫 공판 기일에 A씨에게 국선변호인 선정 청구를 기각한다고 알렸다. 형사소송규칙상 피고인이 빈곤 등의 사유를 소명해야 하는데, A씨의 소명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A씨는 국선변호사 없이 홀로 2심 재판을 받았고, 2심 재판부는 A씨의 항소를 지난 6월 기각했다.

대법원은 2심 재판부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해당 형사소송규칙에는 재판 기록에 의해 피고인의 빈곤 등 사유가 소명됐다면 별도의 소명자료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1심 재판 과정에서 A씨는 월 200만원의 급여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 사실, 채권압류 및 추심 명령이 내려져 있어 은행 계좌 출금이 제한된 사실, 가족들과 함께 사는 월세방의 가구 등도 압류된 사실 등을 밝힌 바 있다.

대법원은 이 같은 기록에 의하면 A씨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다는 점이 소명됐다고 봤다. 2심 재판부가 형사소송법 규정을 어기고 국선변호인 조력을 받지 못하게 한 것은 위법이라는 취지다.

대법원은 지난 1월에도 비슷한 판결을 내린 바 있다. 1심 재판 기록에 의해 빈곤 등 사유가 충분히 인정된다면, 피고인이 2심 재판부에 별도로 소명 자료를 내지 않았더라도 국선변호인을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피고인이 국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효과적인 방어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지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