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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77세에 투표지 잘못 준 선관위, 되레 그 노인 수사 의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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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5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396회 국회(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검수완박’ 법안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임호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5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396회 국회(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검수완박’ 법안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지난해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70대 여성이 투표소를 제때 방문하고도 투표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투표 사무원이 제대로 신원 확인을 하지 않은 채, 동명이인인 다른 사람이 선거인 명부에 서명하고 투표하도록 방치했기 때문이다.

선거관리위원회 측의 행정 실수로 유권자의 투표권이 침해됐는데도, 정작 선관위는 내부 문책 절차를 밟기는커녕 동명이인 투표자에 대한 수사만을 의뢰했다. 선관위가 자신들의 선거 관리 책임을 유권자에게 고스란히 전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 임호선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월 7일 오전 11시 20분쯤 서울 강북구 삼각산동 제7투표소를 찾은 A씨(76세)는 투표 사무원으로부터 “이미 투표하신 거로 돼 있어 투표할 수 없다”는 안내를 받았다. 선거인 명부의 A씨 서명 확인란에 이미 서명이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A씨는 “나는 투표하지 않았다”고 거세게 항의하며 “투표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서울 강북구 선관위는 5시간이 넘는 논의 끝에 A씨에 ‘투표 불가’ 결정을 내렸다. 선거인 명부의 서명이 A씨 필적과 유사한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이날 오전 8시쯤 투표소 CCTV에 A씨와 걸음걸이·체형·머리모양이 유사한 선거인이 등장했다는 이유를 댔다.

실제 A씨 서명란에 서명하고 투표한 인물은 A씨가 아닌, 인근에 거주하는 동명이인 B씨(77세)였다. B씨는 이날 자신의 투표소로 가는 대신 1.4㎞ 떨어진 제7투표소를 잘못 찾았다. 두 사람은 주소도 다르고 나이도 달랐지만, B씨가 동명이인 A씨의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기표와 투표를 마치기까지 선거 사무직원 어느 하나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날벼락을 맞은 건 선거 사무직원이 아닌 투표를 마친 B씨였다. 선관위가 선거 엿새 뒤 동명이인 투표 사태에 대해 수사를 의뢰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4개월간의 수사를 벌인 끝에 “B씨가 타인 명의로 투표한다는 인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사건을 불기소 처분했다.

A씨는 이 사건과 관련해 지난해 6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선거관리 사무원들의 업무상 잘못으로 인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함으로써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는 이유에서다. 1년 넘는 재판 끝에 서울북부지법은 지난 7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빼앗긴 투표권의 대가는 100만원에 불과했다. 선관위는 위자료가 과다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항소를 포기했다.

박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박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임호선 민주당 의원은 “선관위의 방만 투표소 관리가 이미 지난해 4월 재보궐 선거에서 드러났는데도, 아무 시정 조치가 없으니 결국 대선 부실 투표 논란으로 귀결된 것”이라며 “이런 식으로 선거 관리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면 안된다.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선관위 관계자는 “투표 사무원은 정식 선관위 직원이 아니라 징계가 어렵다”며 “부정 투표 의혹이 벌어지더라도, 선관위로선 투표한 당사자를 찾아내기 위해 수사를 의뢰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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