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콕 지문' 찍어 투표 위조…은밀히 판 바꾸는 '제3의 손' 정체 [재건축·재개발 복마전 2-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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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재건축‧재개발 복마전

서울‧경기와 6대 광역시에서 추진 중인 재건축‧재개발 사업장은 1625곳이다. 서울이 592곳으로 가장 많고, 경기도는 370곳이다. 광역시 중에는 대구가 244곳으로 가장 많다. 다음은 부산(205곳), 대전(83곳), 인천(74곳), 광주(40곳), 울산(17곳) 순이다.

[뉴스 너머: beyond news]

전국적으로 재건축‧재개발이 진행 중이지만 분쟁‧소송이 없는 곳을 찾기는 힘들다. 오죽하면 ‘조합 있는 곳에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합원 간 내부 갈등이 심각한 것이 대한민국 도시정비사업의 현실이다.

중앙일보는 수십 년 째 반복되고 있는 도시정비사업의 복마전을 추적했다. 조합장과 임원들을 둘러싼 각종 비위와 갈등·의혹의 현장, 허위 내지는 부풀려진 용역 사업비의 실태를 면밀히 들여다봤다. 또 비리가 반복되는데도 왜 근절되지 않는지도 살펴봤다.

〈글 싣는 순서〉
1. 갈 길 바쁜 재건축·재개발 사업, 비리가 발목 잡았다
2. 비리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허위 사업비와 만능 키 OS
3. 반성 없는 사업, 조합원이 똑똑해야 부패가 사라진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찾아오겠다고 전화가 온다. 오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늦은 밤에도 집 앞까지 찾아오더라."  

울산광역시 관내 한 재개발 조합의 조합원인 정지선(41)씨는 OS요원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OS는 아웃소싱(outsourcing)의 줄임말이다. 정비 사업 현장에서 조합이나 시공사의 하청을 받아 각종 업무를 보조한다. 하지만 단순 업무 보조원 정도로 보면 오산이다. 실제로 이들은 재건축·재개발 사업을 움직이는 ‘제3의 손’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각에선 조합원들의 여론을 특정 방향으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만능 키'에 비유하기도 한다.

복잡한 정비 사업에서 조합원들이 사업을 이해하도록 돕는 게 본래 OS의 역할이다. 그러나, 많은 현장에서 OS요원의 활동은 문제가 돼 왔다. 실제로 OS는 조합원 총회,시공사 선정, 조합장 선거 등 경쟁이 치열한 사업 과정 곳곳에 깊숙히 개입한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OS로 일하는 이들은 대부분 30~50대의 평범한 여성이다. 지속적으로 조합원들과 접촉해야 하는 등 업무 강도가 낮지 않아, 일당은 15만~20만원 선으로 책정돼 있다. 겉보기와는 달리 이들의 조직력과 거기서 나오는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목적 달성 위해…수단·방법 안 가려"

특히 재건축 사업 진행 과정에서 기존 건물의 철거와 착공에 앞서 거쳐야 하는 관리처분계획 인가 단계에서 OS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관리처분계획안이 총회에서 통과된다는 뜻은 각종 용역사업비와 추가되는 특화공사비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합과 업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관리처분계획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사전에 OS가 동원돼 조합원들에게 서면결의서에 찬성 표시를 하도록 유도한다. 조합장 선거에서도 OS의 활동은 여론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2018년 3월 서울 송파구 헬리오시티(구 가락시영) 조합장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 진영이 200명에 가까운 OS 요원을 동원해 치열한 선거전을 펼친 것은 업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당시 상황을 잘 하는 한 조합원은 "마치 구청장 선거 이상으로 과열된 분위기가 있었다"며 "각 후보별로 고용된 OS가 은밀히 조합원들을 만나러 다니며 경쟁적으로 특정 후보를 찍도록 유도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OS의 특징”이라고 했다. 투표용지를 바꿔치기 하는 등 선거 부정을 저지르거나, 조합원 대신 불법적으로 동의서에 싸인을 하고 지장을 찍는 일도 다반사다. 최근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된 잠실5단지의 경우도 OS요원이 개입해 투표용지를 바꿔치기 했다는 내부 증언이 나온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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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의 일부분만…‘콕 지문’ 의혹까지

취재 과정에서 조합원 대신 지장을 찍을 때 OS가 ‘콕 지문’을 활용한다는 증언도 나왔다. 서울 관내 한 재개발조합의 조합원 유은하(가명·여)씨는 조합원이 제출한 서면 결의서를 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했다. 조합원의 지장이 온전한 형태로 찍힌 것이 아니라, 3분의 1정도로 ‘콕’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유씨는 “아는 OS한테 물어보니 그걸 ‘콕 지문’이라고 부르더라. 나중에 불법으로 대리 서명한 걸 들키더라도 지문 감식이 불가하게 지장의 일부분만 찍어놓는 수법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조합이 고용한 OS요원은 조합 집행부와 대립하는 조합원의 평판을 나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경기도 고양시 한 재개발 조합원인 문소영(가명·여)씨가 조합의 문제점을 알리고 조합장 해임을 시도하자, OS는 문씨에 대해 “전국구를 다니며 활동하는 외부세력이다. 그 사람 말 들으면 사업만 늦어진다"라며 주변에 문씨에 대한 여론을 나쁘게 몰고 갔다. 문씨는 “차라리 진짜 외부에서 온 '꾼'’이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았을 거다”라며 “조합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조합원들을 뒤에서 겁주고 여론도 쉽게 조작했다”라고 말했다.

OS홍보비…"결국 조합원 부담"

1999년 OS 현장요원으로 시작해 2000년대 중반 업체 대표직에 오른 나지영(가명)씨는 "OS 고용에 들어간 홍보비는 결국 조합원들이 추가로 분담해야 할 돈"이라며 "각종 용역 계약이 왜 부풀려지겠나"라고 귀뜸했다. 나씨는 선거 과정에서 조합이 OS요원들을 활용해 조합원들에게 접근하는 수법도 소개했다.

"홍보요원들은 원칙적으로 선거 기간에 조합원 집을 방문할 수 없다. 하지만 편법을 쓴다. 일반 안건을 다루는 조합 총회를 선거 기간에 같이 연다. OS가 일반 총회를 명목으로 집집마다 방문할 수 있고 이때 특정인에게 표를 달라고 유도할 수 있다. '사업이 빨리 진행되려면 이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게 주 레퍼토리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건설사 관계자는 "투명한 사업을 위해 OS 근절을 외치지만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OS를 고용하지 않으면 단 한 건의 사업도 수주할 수 없는 것이 이 업계의 현실"이라고 했다.

중앙일보 기획취재국이 만드는 ‘뉴스너머’(beyond news)는 뉴스 너머에 있는 실체적 진실을 파헤친 탐사보도를 뜻합니다. '뉴스너머'는 시민의 제보(beyond_news@joongang.co.kr)를 받습니다.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위와 비리 의혹, 불공정·부당 사례를 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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