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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기업’ 너마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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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백일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백일현 산업팀 차장

백일현 산업팀 차장

얼마 전 만난 식품업계 인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유를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에서 이럴 줄 몰랐다. 경제부총리까지 나서 노골적으로 기업에게 경고한 셈이다.” 지난달 추경호 부총리가 민생물가 점검회의에서 가공식품업계에 가격 인상 요인을 최소화해 달라고 했던 발언을 거론한 것이다. 식품업계 동향을 일일 모니터링하고 ‘가격 안정을 위한 협의’를 적극 진행하겠다는 발언도 부담스럽단 반응이다.

다른 식품업계 인사도 씁쓸해했다. “원재료값, 환율 상승 와중에 원가를 절감하려 노력해왔는데 정부는 식품업계도 물가 상승 고통을 감내해온 경제주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국제 곡물 가격과 환율 급등 등을 이유로 식품업계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형마트 매대 모습. [뉴스1]

국제 곡물 가격과 환율 급등 등을 이유로 식품업계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형마트 매대 모습. [뉴스1]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정부는 마땅히 할 얘기를 했다. 지난 1~2년 사이 기업들이 두세 번씩 가격을 올리는 건 달갑지 않으니. 하지만 “가격 인상 요인이 있는데 정부 압박 때문에 업체들이 오히려 10월 전에 서둘러 가격을 올리게 된다”(식품업계 인사)는 말까지 나온 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10월 이후 물가가 개선된다”는 정부의 ‘10월 정점론’ 때문에 가격 인상을 더 앞당겼다는 말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정부가 말하지 않아도, 웬만한 기업은 알아서 소비자 눈치를 본다. 비정규직 비율이 낮다는 이유 등으로 이른바 ‘착한 기업’으로 불리던 오뚜기는 최근 제품 가격을 올린다는 보도자료를 내며 경쟁사 3곳을 실명으로 거론해 논란이 됐다. 2008년 이후 가격 인상은 자사가 2회로 가장 적었고 경쟁 기업은 3~4회 인상했다는 내용이다. 업계에선 “경쟁사 실명 언급을 피하는 게 업계 불문율인데 경쟁사를 대놓고 저격했다. 착한 기업 이미지를 지키고 싶어 그랬을 것”이란 말이 나왔다.

그동안 가격 인상을 자제해와 시장에서 ‘착한 경영’을 한다는 말을 들었던 오리온도 9년 만에 가격을 올렸다. “향후 원부자재 가격과 에너지 비용이 하향 안정화되면 제품량을 늘리거나 제품 가격을 인하하겠다”고 강조하면서다. 소위 ‘착한 기업’이라 불렸던 기업들의 이런 행보는 고물가·고환율 파도를 넘기가 만만치 않다는 방증이다.

물론 시류를 악용해 가격을 올리는 기업도 있다. 일부 프랜차이즈 업체는 향후 매각을 위해 영업이익률을 높이려 가격을 자주 인상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부당한 가격 인상’이라 말하려면 근거가 더 필요하다. 공개된 정보가 한정된 와중에도 원가 분석 등으로 기업의 가격 인상이 정당한지 살피는 소비자 단체 노력에 주목하는 이유다. 정부도 환율 관리 등 실제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될 만한 일에 집중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