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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고생했다, 소설가 김성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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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소설가 김성동은 바둑 실력이 상당했다. 2018년 7월 소설 『국수』 출간기념회 모습. [중앙포토]

소설가 김성동은 바둑 실력이 상당했다. 2018년 7월 소설 『국수』 출간기념회 모습. [중앙포토]

소설가 김성동을 처음 본 것은 1970년대 후반의 어느 초겨울이었다. 승복을 입은 두 사람이 종로 관철동 한국기원 근처의 골목에 있는 한평여관에 들어섰다. 우리는 곧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서로 초면인데 왜 술을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긴 밤을 새워가며 오가는 말 속에서 두 사람이 실은 가짜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잡지에 소설이 당선되었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승적을 박탈당했다는 것. 스님도 ‘쯩’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렇다면 왜 승복을 입고 다니냐고 묻자 중 옷을 벗으면 먹고 살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입고 다닌다고 했다. 이 여관의 여주인만 해도 독실한 불교 신자라 올 때마다 잠을 재워준다고 했다. 김성동은 법명이 ‘정각’이었는데 그는 밤새도록 허리를 곧게 편 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눈빛은 맑고 목소리는 진중했다. 굉장한 호감을 느꼈고 그날 이후 우리는 친구가 됐다. 문학평론가 최원식과 소설가 송기원, 그리고 김인 국수와도 이 무렵 친해졌다.

얼마 후 김성동은 한국기원이 펴내는 월간 ‘바둑’지의 기자로 속세에 첫발을 딛게 된다. 그는 조부로부터 한문과 바둑을 배웠다. 수준이 상당했다. 짐작건대 그의 바둑 실력은 아마추어 5단과 6단 사이의 실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바둑을 둔 일이 한 번도 없다.

바랑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원고 뭉치가 ‘만다라’라는 소설이 되더니 상을 받았다. 상금도 받았다. 우리는 그 상금을 일주일 동안 다 술로 마셨다. 마지막 날 종로 3가의 지하다방에 앉아 언젠가 같이 툰드라 지방을 여행하자고 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도 젊고 미소가 풋풋했던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 보면 김성동의 삶은 비감했고 문자 그대로 고해(苦海)였다. 절에 남아 화두를 붙들고 용맹정진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었다. 따르던 명문대 출신 여성과 가정을 꾸렸으나 실패했다.

따뜻함을 갈망했으나 그의 어깨는 항시 추워 보였다. 남로당 운동을 하다 처형당한 아버지가 남겨둔 커다란 보따리 속에는 그가 알고 싶은 많은 것이 있었다. 가슴이 뜨거웠다. 한이 깊었다. 김성동은 공부를 참 많이 했다. 많이 썼다. 슬프고 빗나간 역사를 어떤 식으로든 제자리에 돌려놓고 싶어했다. 짊어지기엔 너무 크고 무거운 짐이었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문제가 실은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고통만을 남겼다. 때로는 자기연민에 젖어 모든 방어를 포기하고 술에 취해 울었다. 언제 보니 몸이 종이처럼 가벼워 있었다.

김성동은 울대(그는 서울대를 그렇게 불렀다)를 싫어했다. 울대 출신들은 매끄럽고 잘 타협하고 기회주의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 매끄러움과 위선에 대해 그는 생래적인 거부감을 보였다. 어느 책 서문에 그는 “증조할아버지는 경술국치에 스스로 세상을 버렸고 우리 집안은 그 후 5대째 가난뱅이로 사는데 친일파들은 3대째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썼다. 그래도 김성동은 경기도 양평에 살면서 그곳으로 은퇴한 서울대 출신들과 그럭저럭 어울려 지냈다.

소설 『국수』를 완간했을 때 소설가 송기원, 모멘토 출판사의 박경애씨와 함께 양평에 갔다. 즐거운 하루였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무거움은 다 털어버리고 옛이야기 하며 웃었다. 그렇게 헤어졌다. 박경애씨가 “헤어질 때 김성동씨가 돌아서서 눈물짓더라”고 말했다. 온몸을 던져 분투했으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다.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몸은 늙었다.

충주로 이사 간 뒤로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해남의 송기원에게 같이 가자고 했는데 못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난주 김성동의 장례식장에 가니 누님 정동씨가 맞아줬다. 죽기 전에 바둑TV를 많이 봤다고 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음을 앞두고 바둑을 바라보는 김성동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허무하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 우주의 심연으로 그를 떠나보낸다. “고생했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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