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하는데 못빼먹으면 바보" 이러니 조합 비리 판친다 [재건축‧재개발 복마전 1-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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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재개발 복마전

〈글 싣는 순서〉
1. 갈 길 바쁜 재건축·재개발 사업, 비리가 발목 잡았다
2. 비리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허위 사업비와 만능 키 OS
3. 반성 없는 사업, 조합원이 똑똑해야 부패가 사라진다

지난달 15일 잠실5단지 재건축비대위의 조합원들이 서울동부지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양수민 기자

지난달 15일 잠실5단지 재건축비대위의 조합원들이 서울동부지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양수민 기자

지난달 15일 오전 8시, 서울동부지검 정문 앞에 현수막과 피켓을 든 이들이 모여들었다. 서울의 대표적 재건축 단지 중 하나인 잠실주공5단지 조합원들이다. 비상대책위원회 소속이라고 밝힌 이들은 "지난 2016년 조합 선거는 부정선거였다"며 "검찰의 엄정하고 신속한 수사를 촉구한다"고 했다. 이들은 이날 검찰에 '신속 수사 촉구서'를 접수했다.

[뉴스 너머: beyond news]

조합 업무에 깊숙이 관여해 온 A씨는 중앙일보와 만나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당선시켜야 할 조합장과 대의원들을 기록한 ‘정답표’가(사진 참조) 존재했고 ▶정답표에 따라 투표용지를 조작했으며 ▶조작해 둔 투표용지를 조합원이 투표한 정상 용지와 바꿔치기하는 식으로 부정이 이뤄졌다고 한다.

정답표, 비밀 점…투표용지 바꿔치기 의혹

서울 잠실 5단지 조합 임원 선거에 활용된 '정답표'의 모습. 당선시켜야 할 사람 옆에 점을 찍어 표시해놨다. 제보자 제공

서울 잠실 5단지 조합 임원 선거에 활용된 '정답표'의 모습. 당선시켜야 할 사람 옆에 점을 찍어 표시해놨다. 제보자 제공

조합원들은 각자 사정에 따라 사전투표, 우편투표, 현장 투표(총회 당일) 등 세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 투표권을 행사했다. A씨는 "잠실 주공 5단지는 우편투표를 가장한 제4의 불법 투표 방식을 동원했다"고 주장했다.

원칙적으로 우편투표에 참여하는 조합원은 투표용지를 봉투에 넣어 직접 우편 발송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일부 조합원은 기표한 투표용지를 봉투에 담아 조합 사무실로 가져왔다. 조합 측에서 "대신 우체국에 부쳐주겠다"며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렇게 조합 사무실에 모인 100여장 이상의 투표용지를 우체국에 보내기 전에 당선될 사람이 미리 표기된 투표용지와 바꿔치기를 했고, 봉투에 넣은 후 겉면에는 ‘비밀 점’을 찍어 표시했다”는 것이 A씨가 설명한 조작 방법이다.

조작을 마치고 봉투를 우체국에 가져간 후 다시 조합으로 우편배달이 정상적으로 된 것처럼 눈속임했다는 것이다.

A씨는 또 "우체국 발송 전에 봉투 겉면에 ‘비밀 점’을 찍은 것은 ‘일을 두 번 하지 않기 위한 수법’이었다"고도 했다. 조합원이 정상적으로 우편투표를 해 발송한 봉투, 조작을 마친 봉투가 혼재된 채로 조합 사무실에 배달된다. 이때 이미 바꿔치기를 마친 봉투까지 일일이 다시 열어 확인하려면 일이 두 배가 되기 때문에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한다. A씨는 “우편투표 봉투가 다시 (조합 사무실로) 배송되면 도착하면 그중에 점이 없는 것만 골라 역시 조작을 하는 식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검찰 수사 결과 A씨 말대로 당시 부정 선거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잠실주공5단지 재건축 사업 추진은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이미 2015년에 당시 조합장이 용역업체 선정 대가로 업자로부터 억대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검경 수사로 드러나 이미 한차례 내홍을 겪은 바 있다. 현 조합장은 부정 선거 의혹이 일고 있는 지난 2016년 조합 선거에서부터 이번 9월 초 열린 총회까지 연임에 성공해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조합원 의결 없이 1500억대 계약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 현장 모습. 뉴스1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 현장 모습. 뉴스1

잠실5단지 외에 안팎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현장이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 단지’로 불리는 이곳은 공사비 증액 문제를 놓고 조합 집행부와 시공사업단과의 갈등으로 4월부터 공사가 멈췄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사업 과정에서 불법성 논란까지 불거져 악재가 겹쳤다.

지난 8월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합동점검 결과 둔촌주공 재건축 조합을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도정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조합 측은 조합원의 의결 없이 13건의 시공 계약을 맺은 것으로 나타났다. 계약 금액만 1595억원이다. 정비기반시설 공사를 한다며 올해 2월 J사‧D사 등과 예산을 초과한 계약을 맺었고, 3월에는 N사‧D사 등과 쓰레기 자동집하시설 공사 등을 각각 193억원, 66억원에 체결했다.

이 밖에도 둔촌주공 조합은 신축아파트 브랜드 개발, 지하철 출입구 이설 공사 등 명목으로 도정법을 위반한 계약을 맺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둔천주공 정상회위원회 관계자는 “법을 위반해 조합원에 손해를 끼친 계약 중 5건은 재작년 사퇴한 조합장 시절이고, 8건은 최근 사임한 조합장 때 일”이라며 “공사 중단 사태가 터지고 나서야 조합 집행부가 얼마나 독단적이고 위법하게 일을 집행했는지 알게 돼 씁쓸하다”고 했다.

"법적 다툼만 27건, 견적이 안나오더라"

조합원 간 갈등, 민‧형사상 고소와 고발 등 각종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정비사업의 현실이다. 재건축 조합 수사 경험이 풍부한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한 수사관은 "내가 수사했던 한 조합은 몇 년 동안 고소, 고발 등 크고 작은 법적 분쟁만 27건이나 됐다"며 "워낙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다투다 보니 수사에 들어가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소위 견적이 잘 안 나오더라"며 혀를 찼다. 복마전 같은 상황이 전국 곳곳의 재건축 현장에서 벌어지다 보니 ‘조합 있는 곳에 반드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있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본지 집계 결과, 서울‧경기와 6대 광역시에서 추진 중인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은 1625곳이다. 소규모 재건축, 리모델링, 지역주택조합과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하는 주거환경개선 사업장은 제외한 수치다. 서울이 592곳으로 가장 많고, 경기도는 370곳이다. 광역시 중에는 대구가 244곳으로 가장 많다. 다음은 부산(205곳), 대전(83곳), 인천(74곳), 광주(40곳), 울산(17곳) 순이다.

문제는 전국 정비사업 조합의 상당수가 정부나 지자체의 짧은 기간(대략 2주) 실태 점검만으로도 각종 부조리와 비위가 쏟아질 정도로 조합 운영에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가장 흔하게 적발되는 문제는 조합원 결의 없이 각종 용역 사업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어떤 허위나 낭비성 사업이 있는지를 조합원이 알기는 쉽지 않다.

서울 은평구 갈현1구역 재개발 조합도 그중 하나다. 최근 은평구청은 서울시와 합동 실태점검 후 이 조합을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본지가 입수한 점검 결과에 따르면, 이 조합은 반드시 거쳐야 할 대의원회 의결 없이 조합장 임의로 다수의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일부 계약은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다. 또한 대의원회의 의결 없이 법률사무소와 8차례에 걸쳐 소송 위임 계약을 맺었고, 경쟁 입찰 없이 특정 업체와 여러 건의 수의 계약을 맺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 3년에 걸쳐 10억원가량의 예비비를 사용했으면서도 명세서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갈현1구역 비대위 관계자는 “이외에도 수백억원 상당의 신재생에너지 시설 관련 중복 입찰 등 의혹이 한둘이 아니다”며 “조합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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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법‧제도, 무관심이 불법 행위 방치

도시정비사업 과정에서의 각종 불법과 비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의 골칫거리였다. 수사와 관련 고발 보도가 이어졌지만 복마전 같은 사건은 전국적으로 현재진행형이다. 2013년 중앙일보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재건축 조합들이 억대의 허위 지장물 철거 별도 계약을 철거업체와 맺은 사실을 고발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보도를 본 서울시는 해당 조합에 공문을 보내 시정 조치를 하도록 했다. 보도 후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전국의 많은 조합에서 반복되고 있다. 지자체의 부실점검과 무관심, 수사기관의 의지 부족 등이 겹친 탓이다.

수도권 재건축 사업 참여 경험이 많은 한 전직 철거업자는 "남들 모두 빼 먹는데 나만 못 먹으면 바보라는 말이 아직도 통한다"라며 "전국의 많은 조합이 지장물 철거 관련 별도 계약을 진행하고 있어 오히려 이것이 정상인 것처럼 돼 있다"라고 했다. 검찰 수사관 출신으로 지난 10년간 재개발‧재건축 비리를 고발해 온 도시정비사업 전문가 김상윤 법무사(저스티스파트너스 대표)는 “허술한 법‧제도와 행정‧수사기관의 비전문성과 무관심 등으로 재건축 불법 행위가 수십 년 째 반복되고 방치되고 있다”며 “조합원 스스로가 조합을 감시해야 하고 전문성을 기르지 않으면 내 재산을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기획취재국이 만드는 ‘뉴스너머’(beyond news)는 뉴스 너머에 있는 실체적 진실을 파헤친 탐사보도를 뜻합니다. '뉴스너머'는 시민의 제보(beyond_news@joongang.co.kr)를 받습니다.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위와 비리 의혹, 불공정·부당 사례를 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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