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영국 파운드화의 추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70년 치세가 막을 내림과 함께 많은 것이 달라진다. 영국 파운드화 도안도 그중 하나다. 영국의 모든 지폐와 동전의 앞면을 장식했던 엘리자베스 2세 얼굴은 그의 뒤를 이은 찰스 3세 얼굴로 바뀐다. 1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조폐국 전통에 따라서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 회사는 알프레드 대왕(849~899년) 시절부터 왕의 얼굴을 동전에 새겨왔고 지금까지 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영국 조폐국은 조각가 마틴 제닝스가 만든 새로운 도안의 50펜스짜리 동전을 공개했다. 왕관을 쓰지 않은 찰스 3세의 왼쪽 옆 모습이 새겨졌다. 왕관을 꼬박꼬박 챙겨 쓰고 동전과 지폐에 등장했던 엘리자베스 2세 도안과 달랐다. 공교롭게도 엘리자베스 2세가 떠난 직후 기축통화로서 파운드화 왕좌가 크게 흔들리는 중이다.

기축통화는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는, 금과 비슷한 지위를 갖는 통화를 뜻한다. 준비통화로도 불리는데 세계 각국이 외환보유액 같은 비상금 창고에 이들 통화를 쌓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기축통화로 인정받는 통화는 몇 개 안 된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기축통화하면 파운드화 하나였다.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 대열에 올라선 건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100년도 채 안 됐다. 이후 일본 엔화, 유로화가 그 반열에 올랐다.

기축통화 원조 격인 파운드화가 최근 위기에 몰렸다. 물가를 잡겠다며 미국 중앙은행이 무서운 속도로 금리를 올려대는 와중에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가 기름을 부었다. 취임하자마자 450억 파운드, 한화로는 약72조원에 이르는 감세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치솟는 물가 때문에 영국 경제가 엉망인데 돈을 더 쏟아붓겠다는 처방이 나오자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물가를 더 끌어올리고 나랏빚만 늘릴 것이란 불안은 파운드화 투매로 이어졌다. 1파운드 가치는 역대 최저인 1.03달러까지 내려갔고 국가신용등급 전망 강등, 주택담보대출 중단 등 파장은 컸다. 트러스 내각이 감세안을 철회했지만 신뢰를 회복하기엔 늦었다는 평가다.

200년 넘게 공고했던 파운드 왕국이 흔들릴 만큼 전 세계 금융시장 폭풍이 거세다. 한국도 그 한가운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