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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동찬이 고발한다

허겁지겁 박진 해임안 통과…김진표 '민주 고무도장' 전락했다

중앙일보

입력

신동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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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봉 두드리는 김진표 국회의장. 배경은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 표결 직전의 국회 본회의장. 그래픽=박경민 기자

의사봉 두드리는 김진표 국회의장. 배경은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 표결 직전의 국회 본회의장. 그래픽=박경민 기자

지난달 29일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박진 외교부 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기어이 통과시켰다. 해외순방 중 우연히 알려진 실언에 유감 표명을 안 해 문제를 계속 확산시키는 윤석열 대통령도 딱하지만, 굳이 죄를 묻자면 대통령이 카메라가 꺼진 줄 알고 내뱉은 말을 들은 것뿐인 장관을 한사코 해임하라고 쪽수로 몰아붙이는 야당 행태도 어처구니없다. 그런데 난 김진표 국회의장이 가장 실망스럽다. 미국 부통령 방한 중에 벌어진 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 통과라는, 지극히 민망스럽고 좀스러운 사태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의장은 누가 시키는 대로 의사봉만 두드리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5선 의원으로 노무현 정부 땐 부총리를 지냈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지난 19대 대선 직후 바로 문재인 정권의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위원장(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해당)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 그가 여야를 중재하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거나 국익을 위한 판단을 하는 대신 민주당 당론을 따랐다. 속된 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을 친 셈이다.

문제는 국회의장은 그래선 안 된다는 점이다. 국회법은 '국회의장은 의장으로 당선된 다음 날부터 의장 재직 동안 당적을 가질 수 없다'(제20조의 2 제1항 본문)고 규정하고 있다. 김 의장이 아무리 민주당에서 잔뼈 굵은 정치인이라도 지난 7월 제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이 된 이후로는 초당적으로 국회를 운영했어야 한다.

지난 8월 21일 김진표 국회의장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정부가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외교 공백이 있다면 국회가 앞장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뉴스1

지난 8월 21일 김진표 국회의장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정부가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외교 공백이 있다면 국회가 앞장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뉴스1

이를 모를 리 없다. 김 의장은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여야는 물론이고 정부와 국회, 대통령과 야당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기 위해 힘쓰겠다”며 “국회 운영에 있어 다수결은 중요한 기준이지만 49% 소수 의견도 수렴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게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했다. 특히 “정부가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외교 공백이 있다면 국회가 앞장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처리할 때 보여준 그의 처신은 국회법 정신에 반할뿐더러 취임 기자 간담회에서의 스스로 내놓은 다짐을 무색하게 하는 고무도장(rubber stamp) 노릇이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방한 때 주무장관을 해임하겠다는 비상식적 건의안이었는데도 김 의장은 그 스스로 말한 것처럼 “정부가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외교 공백을 앞장서 메우기”는커녕 오히려 허겁지겁 국회 본회의를 열어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켜줬다. 그나마 여당인 국민의힘 반발로 본회의 시작만 해리스 부통령이 공식 일정을 마친 오후 6시 이후로 미뤘을 뿐이다.

김 의장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장관 해임건의안을 포함해 국회에 올라온 모든 안건의 표결은 국회의장이 '표결할 안건의 제목을 의장석에서 선포하여야'(국회법 제110조 제1항) 한다. 의장이 '표결을 선포한 후에는 누구든지 그 안건에 관하여 발언할 수 없다'(같은 조 제2항)는 규정에서 볼 수 있듯 국회에서 안건 표결 여부는 의장의 절대적 권한이다. 이런 막강한 권한을 특정 정당을 위해 남용하지 못하도록 국회법은 당적을 포기하도록 못 박은 것인데, 그는 이런 정신에 비추어 중립적이고 공정해야 처신하는 대신 민주당의 고무도장 역할만 충실히 했다.

어쩌면 이런 비판이 한국 정치에선 현실과 동떨어진 너무나 이상적인 바람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의장 경선 때 이미 이런 행태가 예견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국회를 무시하고 사법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국정 독주를 해 나가는 윤석열 정부를 강하게 견제하는 일이 국회 다수당인 우리 민주당의 사명이고 운명”이라 했다. 그리고 의장이 되기에 앞서 경선 기간인 지난 6월 민주당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강행 처리 때 법사위에 투입, 안건조정위원장을 맡아 국민의힘의 정상적인 심의권마저 봉쇄했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수석부대표, 김미애, 장동혁 원내대변인이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안과에 김진표 국회의장 사퇴 촉구 결의안을 제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수석부대표, 김미애, 장동혁 원내대변인이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안과에 김진표 국회의장 사퇴 촉구 결의안을 제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아무리 한국적 정치 상황이 비정상적이라고는 하지만 국회법상 국회의장의 공정하고 중립적인 결정 의무나 그 스스로 국민에게 했던 약속을 당리당략에 따라 헌신짝처럼 버려도 그만일 걸까. 제대로 돌아가는 국회라면 국회법 규정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본인이 내뱉은 발언조차 공염불로 만드는 의장을 향해 강력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고 본다.

김 의장에게 그 유명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얘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 20세기 초 독일 간첩으로 몰려 절해고도에 유배된 유대인인 프랑스군 대위 드레퓌스를 구명하려 쓴 글 말이다. 막강한 군부를 두려워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 탓에 대문호로 추앙받던 졸라 조차 기고할 매체를 찾기 힘들었는데, 급진 공화파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가 흔쾌히 자신의 신문 '로로르(L'Aurore)' 1면을 통째로 내주어 보수적 군부와 가톨릭 세력을 저격한 졸라의 글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드레퓌스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끌레망소는 우리로 치면 진보적 야당 정치인 격으로 반골 기질은 지금 우리의 야당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 그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해 파리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총리를 맡아 맹렬하게 독일과 싸워 승전을 이끌었다. 외교·안보만큼은 여야나 진보·보수가 따로 없다는 프랑스의 연면한 전통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글이 실렸던 프랑스 신문 '로로르' 지면. 중앙포토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글이 실렸던 프랑스 신문 '로로르' 지면. 중앙포토

법에 따라 초당적, 중립적으로 국회를 운영해야 하는 국회의장마저 진영 논리에 휘둘려 사실상 추태에 가까운 국회 운영을 하는 우리 정치 현실에선 끌레망소 사례는 초현실적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더군다나 지난 세계대전 못지않은 위험천만한 국제 정세로 거센 격랑이 몰아치고 있는 와중에 국회의장이 앞장서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걸 보자니 그 결과가 참으로 으스스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