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화 폭락 속 열흘만에 백기…英트러스 “부자감세안 철회”

중앙일보

입력 2022.10.03 18:20

업데이트 2022.10.03 21:56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오른쪽)과 쿼지 콰텡 영국 재무장관이 2일(현지시간) 열린 보수당 연례 총회에 참석해 있는 모습.AFP=연합뉴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오른쪽)과 쿼지 콰텡 영국 재무장관이 2일(현지시간) 열린 보수당 연례 총회에 참석해 있는 모습.AFP=연합뉴스

영국 리즈 트러스 정부가 3일(현지시간) ‘부자 감세’라는 비판을 들은 소득세 최고세율 폐지 계획을 철회했다. 지난달 23일 1972년 이후 최대 규모 감세안을 발표한 지 열흘 만이다. 감세조치 발표 후 파운드 가치가 급락하고, 국채금리는 치솟는 등 영국 경제가 휘청인데다, 세계 금융시장마저 혼란에 휩싸이자 기존 계획을 포기했다.

BBC 등에 따르면 쿼지 콰텡 영국 재무장관은 이날 “연간 15만 파운드(16만7000달러) 이상의 소득에 대해 납부하는 소득세 상위 45% 세율 폐지안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는 (감세안 논란을) 알고 있고,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경청했으며 현 상황을 이해했다”며 “45% 세율 폐지가 영국이 직면한 도전을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최우선 임무에서 벗어나는 것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트러스 총리도 트위터에 콰텡 장관의 성명을 공유하면서 “이제 초점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공공 서비스에 자금을 지원하고, 임금을 인상하며, 국가 전역에 기회를 창출하는 고성장경제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당초 트러스 정부는 이날 보수당 총회 직전까지 감세안 고수를 천명했지만, 결국 ‘백기’를 들었다. BBC는 “감세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트러스 총리의 발언 하루 만에 나온 결정”이라며 “거대하고 굴욕적인 유턴”이라고 평했다.

이날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파운드화는 발표 후 소폭 반등했다. 하지만 블룸버그통신은 옵션 거래인들의 말을 인용해 소득세 최고세율 감세 철회만으로는 파운드화 가치가 추가 하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잠재우기에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소득세 최고세율 폐지로 줄어드는 세수는 지난달 23일 발표한 전체 감세 규모 450억 파운드(약 72조원) 중 20억 파운드(약 3조원) 안팎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번 감세안은 내년 0%로 추정되는 영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2.5%로 끌어올리기 위한 공격적인 부양 조치였다. 소득세 최고 세율을 45%에서 40%로 낮추는 등 총 450억파운드(약 72조원) 규모의 감세 정책이 예고됐다. 영국에서 45% 세율이 적용되는 소득 구간은 성인 인구의 1%가량인 50만명에게만 해당하지만, 이들이 워낙 고소득층이라 세입 규모는 60억파운드(약 9조6000억원)를 차지한다. 이 구간 폐지로 줄어드는 세수는 20억파운드(약 3조원) 안팎에 달했다.

문제는 이 같은 감세로 인한 정부 재정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가 빠졌다는 점이다. 시장에선 이를 영국 정부가 엄청난 금액의 국채를 발행해 메운다고 받아들였다. 이 충격으로 영국 국채 가격은 폭락(국채금리 폭등)하고 파운드 가치가 폭락했다. 영국 정부가 감세조치를 통해 재정을 망가뜨리고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부추긴다는 우려가 터져나왔다. 지난달 27일엔 국제통화기금(IMF)까지 나서 ”영국 정부의 감세 정책이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영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훼손할 것“이라며 정책 재검토를 촉구했다.

지난 23일 영국 런던의 한 환전소 앞에 파운드당 유로화와 달러화 환율이 적혀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23일 영국 런던의 한 환전소 앞에 파운드당 유로화와 달러화 환율이 적혀 있다. AP=연합뉴스

영국 정부는 채권을 매입해 가격 급락(금리 급등)을 막겠다며 버텼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이 지난달 28일 10월 14일까지 장기 국채를 하루 최대 50억 파운드씩 총 650억 파운드(약 101조 원) 사들이겠다는 긴급 대책을 발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물가를 잡으려 금리를 올리고 있는 정책 기조와 반대된다는 지적과 함께, 되레 물가를 끌어올린다는 비관론이 확산됐다. “급등한 국채 금리가 영국 기업과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개인들의 차입비용을 높이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왔다.

이에 지난달 30일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기존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하면서 국가 신용등급 강등 위기까지 불거졌다. 외신들에선 영국이 IMF의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다는 위기설까지 보도됐다.

AP통신은 “수백만 명이 치솟는 에너지 요금으로 인한 생계비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이런 가운데 최상위 소득자에 대한 세금을 줄이고 은행원의 상여금 상한선을 폐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독이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지적했다. 마이클 고브 전 주택부 장관은 전날 45% 세율 폐지안이 ‘잘못된 가치들’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감세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정부 차입을 늘리는 것은 보수당답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 영국 여성이 2일(현지시간) 보수당 연례 회의가 열리는 버밍엄에서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에 반대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한 영국 여성이 2일(현지시간) 보수당 연례 회의가 열리는 버밍엄에서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에 반대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결국 이 같은 비판에 트러스 총리는 취임 한달 만에 사임 압박에까지 시달렸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여론조사기관 오피니엄이 최근 벌인 온라인 설문에서 트러스의 업무 수행 지지율은 18%였다. 그가 업무를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55%였다. 보수당 내에서 '신임 총리는 1년 안에 불신임 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당규를 변경해 총리 해임을 모색한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번 정책 철회에도 트러스 총리와 콰탱 재무장관에게 정치적 후폭풍은 이어질 전망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45% 세율 폐지안에서 후퇴하면서 트러스 총리가 다른 감세안도 철회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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