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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그림만 그리다 숨졌다…웹툰 작가 죽이는 '공포의 말' [밀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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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나혼렙)의 그림 작가 장성락 씨가 37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을 두고 웹툰 업계의 고강도 근로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앙일보 [밀실]팀은 K웹툰의 창작 현실을 점검하고 웹툰 당사자 간 문제 해결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3회에 걸쳐 ‘웹툰공장 2022’를 싣는다.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한 웹툰 작가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 밀실팀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한 웹툰 작가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 밀실팀

[웹툰공장 2022 ①]

 “휴재(休載)하면 매출이 떨어져요.” 희귀병이 있는 웹툰 작가 A씨가 계약한 제작사에 ‘수술로 휴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자 담당자가 했던 말이다. 약 10년 전 수술을 받고 완치된 줄 알았던 병은 지난해 초, 첫 연재 시작 3개월만에 재발했다. “연재 초반에 휴재를 할 순 없었다”는 그는 “몸 안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주 7일, 하루 13~15시간씩 매주 그림을 그렸다.

 “수술을 미루면 안 된다”는 의사의 권고에 그는 결국 수술 일정을 잡았지만, 돌아온 건 휴재 만류였다. “누군 쉬고 싶어서 쉬냐”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휴재는 결국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회사는 A씨의 비축 원고 약 8회분을 그의 회복 기간에 풀었고, 두 달만에 A씨는 붕대도 채 풀지 못한 채 연재에 복귀해야 했다. 압박감에 시달리던 A씨는 얼마 후 편두통을 진단도 받았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씩 머리가 아파 병원에 간다”고 A씨는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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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웹툰 작가 B씨는 최근 새 작품 연재 약 1년만에 난치병 진단을 받았다. “이전에 건강 문제는 전혀 없었다”는 그는 “(연재 땐) 하루에 6시간 자면 많이 자는 날이다. 마감이 급할 때는 나흘까지 밤을 새봤다”고 말했다. 올해 연재 30년째인 손희준(46) 작가도 약 20년 전, 한 작품 연재 종료 후 폐결핵에 걸렸었다. 손 작가는 “마감 날 24시간 철야 작업이 거의 기본이었다. 졸리다는 이유로 밥을 안 먹고 일했다”고 기억했다.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한 웹툰 작가가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 밀실팀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한 웹툰 작가가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 밀실팀

“앰뷸런스 안 타봤으면 작가 아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웹툰 작가들은 아프다. “앰뷸런스를 타본 적이 없다면 작가가 아니다”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오갈 정도다. 유명 작가도 예외는 아니다. 웹툰 ‘나혼렙’을 그린 장성락 작가는 지난 7월 향년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속사는 지병으로 인한 사망이라 밝혔지만, 작가들 사이에선 “앉아서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던 사람인데, 과로 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실제 중앙일보가 웹툰 작가 12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인터뷰 작가들 대부분(10명)은 연령 고하를 가리지 않고 지병을 앓고 있었다. 손목 통증, 불면증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희귀병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웹툰을 그리는 과정은 콘티→인물 데생→배경→채색→편집→수정 순으로 이뤄진다. 현재 대부분 플랫폼과의 계약에서 연재 분량은 통상 1화 70컷 이상. 권창호 한국웹툰협회 사무국장은 “보통 극화체(사실적인 그림체) 기준, 컬러 70~80컷을 한 작가가 그리기 위해선 200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말했다. “일주일에혼자 할 수 없는 양”이라는 거다. 첫 연재를 준비 중인 한 작가는 “(혼자) 모든 작업을 다 했다. (하루) 1시간씩 쪽잠을 자면서 그렸는데도 한 달에 1화를 마감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채색·배경 작업을 도와주는 보조작가(‘어시’)가 있지만, 비용이 부담스러워 고용을 꺼리기도 한다. 한 작가는 “어시를 쓸수록 나한테 떨어지는 게 적다 보니, 어시를 줄이게 됐다”고 토로했다.

웹툰 작가 3명 중 1명, 매일 그림 그린다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최근 5년 이내 작품 활동을 한 웹툰 작가 71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웹툰 작가는 하루 평균 10.5시간, 일주일 평균 5.9일을 창작 활동에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하는 작가40.9%, ‘주 7일 일한다’고 한 작가도 36.6%에 달했다. 응답 작가 5명 중 2명 이상(43.4%)은 어시를 쓰지 않고 작업을 했다. 작가들은 ‘작업·휴식시간 부족’, ‘과도한 작업으로 정신·육체적 건강 악화’를 어려움으로 꼽았다.

 과로의 배경에는 늘어난 작업량인기 경쟁이 있다. 과거 주간 만화 잡지 연재 시절과 분량(약 70~80컷)은 비슷하지만, 풀컬러 만화와 극화체가 표준으로 자리 잡으며 절대적인 작업량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흑백 만화는 색칠할 필요가 없고, ‘만화체’는 극화체에 비해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 작업량이 적다. 지난해 네이버웹툰에 연재된 835개 작품 중 흑백 작품은 약 20개에 불과했다. 인기 작품 대부분은 극화체였다.

 많은 연재작 사이에서 독자들을 사로잡고자 분량을 더 늘리고, 화려한 그래픽 효과를 입히는 작품이 나오는 등 경쟁도 치열하다. 지난달 30일 기준 네이버웹툰 월~금 인기 1위(모바일 기준) 웹툰 5개의 1화 평균 컷 수는 93.2컷으로, 일반 웹툰 1화보다 길었다. 어떤 작품은 1화 컷 수가 136컷에 달했다. 권 국장은 “컬러 만화가 거의 의무가 됐다”며 “플랫폼이 요구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안 하면 독자들이 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웹툰 시장 초창기 분량은 대부분 50~60컷이었다. 하지만 컷 수가 점점 늘고 있다.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현재 네이버 웹툰에 연재되고 있는 웹툰들. 사진 네이버웹툰 캡쳐

현재 네이버 웹툰에 연재되고 있는 웹툰들. 사진 네이버웹툰 캡쳐

 아파도 쉬지 못하는 것 역시 무한 경쟁의 영향이 크다. 한 작가는 “휴재를 하면 인기 순위가 떨어진다”며 “업체에서 ‘독자들이 떨어져 나간다’고 해 겁나서 휴재를 못한다”고 말했다. 다른 5년차 작가도 “(휴재 시) 유료 매출이 확 죽어회복이 안 된다”고 말했다.

 작가들은 과로를 막기 위한 기준을 만들어달라고 플랫폼과 제작사에 요구하고 있다. 작가의 휴재권 사용 보장 컷 수 축소 방안을 마련하고, 연재 주기를 다양화해달라는 주장이다. 신일숙 한국만화가협회장은 “독자들이 ‘잘 한다’ 하니 작가들이 욕심을 내고 못 쉬게 된다”며 “강제로 쉬게 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컷) 상한선을 정하고, 넘어가면 2회 연재로 간주해야 한다”며 “1년에 두 번은 유상 휴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 7년차 작가는 “다른 나라에선 격주나 한 달 걸려 하는 분량을 한국 웹툰 시장에선 일주일만에 해야 해 문제가 된다”며 “대형 플랫폼에서 격주·월간 연재 비중을 높여줘야 한다”고 했다.

 플랫폼과 제작사는 아직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한 플랫폼 관계자는 “작가는 고용 관계가 아니고, 플랫폼이 작가에게 선투자를 해 유료 판매 수익이 기대되는 작품의 판권을 확보해 판매하는 구조”라며 “유급 휴재권 개념이 적용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개인 사업자인 작가들에게 플랫폼이 임금 노동자처럼 ‘쉴 권리’를 부여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 관계자는 “업계가 자율적으로 컷수 분량을 조절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강제로 작가의 컷 수까지 제한한다는 것은 역차별의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권창호 국장은 “작가는 개인 사업자가 맞다. 하지만 플랫폼이 조회수나 유료 결제 시스템 등 룰을 만들어 놓고 무한 레이스를 하라는 건 책임 방기”라며 “장기적으로 볼 때 작가의 건강을 보호하는 것이 플랫폼과 웹툰 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득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작가와 플랫폼·제작사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가운데, 계약을 둘러싼 법적 분쟁도 늘고 있다. ‘복마전’이라는 웹툰 시장 속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얼만큼의 몫을 받고 있을까.
(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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