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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봉길의 한반도평화워치

3년째 중단된 한·중·일 정상회의 열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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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동아시아 협력의 길

신봉길 북한대학원대 석좌교수·한중일협력사무국 초대 사무총장

신봉길 북한대학원대 석좌교수·한중일협력사무국 초대 사무총장

서울 광화문 사거리 새문안교회 맞은편에 에스타워 빌딩이 있다. 서울에서 지진에 가장 강한 빌딩이라는 데 그곳 20층에 한중일협력사무국(TCS)이 있다. 한·중·일 3국 정부가 설립한 상설 국제기구다. 사무총장은 세 나라의 대사급 외교관이 2년씩 교대로 맡고 다른 나라는 사무차장을 파견한다. 현 사무총장은 중국의 어우보첸(歐渤芊) 대사다. 필자가 초대 사무총장으로 일할 때 중국 측 사무차장이던 마오닝(毛寧)은 최근 중국 외교부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일본 측 사무차장이던 마츠가와 루이(松川るい)는 귀국 후 정치인(참의원 재선, 방위성 차관)으로 변신했다.

2019년 청두 회의 이후 코로나에 한·일 경색 겹치며 개최 안돼
중국은 개최 동의, 한국이 일본 설득해 회의 재개 이끌어야
코로나19, 공급망, 북한 도발, 미·중 갈등 등 논의 과제 산적
동북아 긴장 완화와 새로운 활력 불어넣는 기회가 될 것

3국 관계가 순탄치 않으니 사무국 활동이 크게 돋보이지는 않지만 사무국이 하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3국 정부 간 모든 중요한 회의의 요약 기록을 만드는 일이다. 사무실 내부는 세계적 컨설팅 회사나 로펌 같은 느낌을 준다. 20층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바로 한·중·일 세 나라의 대형 국기가 나란히 서 있다. 이곳을 방문한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아시아국장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소감을 말한 적이 있다. 태극기·오성홍기·일장기의 병렬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보였다는 이야기였다.

3국 협력의 상징 한중일협력사무국

한반도평화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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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세 나라가 도대체 무슨 협력을 한다는 말인가? 언뜻 보기에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나라는 사실 1999년부터 정례적으로 정상회의를 해왔다.  그해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ASEAN+3’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3 국가’ 정상들(김대중 대통령, 오부치 일본 총리, 주룽지 중국 총리)이 별도 조찬 모임을 가진 것이 시초다. 유럽연합(EU)의 성공을 배경으로 전 세계적으로 지역 협력, 지역 통합의 흐름이 세를 타고 있을 때다.

별도 모임은 한·중·일 세 나라 모두 자기들의 이니셔티브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주룽지 총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끼리 식사라도 한 번 하자”고 제안해서 성사됐다는 것이 중국 측 설명이다. 이 모임이 발전하여 2008년부터는 3국에서 매년 교대로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독자적 정상회의가 되었다. 그리고 2011년 9월에는 TCS가 서울에 설립됐다.

그런데 이 세 나라의 모임은 소리소문없이 확대되어 현재 정상회의 이외에도 21개의 장관급협의체, 차관·국장급의 많은 협의체가 운영 중이다. 3국 외교·재무·환경·문화 장관회의, 재난관리기관장 회의가 그런 것이다.

3국 협력의 진전에는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동아시아비전그룹 창설 제안, 노무현 대통령의 3국 간 독자 정상회의 개최 제안, 이명박 대통령의 TCS 설립 제안이 그것이다. TCS 설립은 동아시아공동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동조함으로써 성사됐다. 사무국은 세 나라가 모두 유치하고 싶어했으나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서울에 위치하게 됐다.

3국이 급속히 가까워지자 부담을 느낀 미국이 견제구를 던지기도 했다. 커트 캠벨 당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한·미·일 간에 사이버 사무국이라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3국 협력 순항해야 한국 입지 커져

3국 협력이 순항할 때는 너도나도 이 배에 같이 타려고 했다. 필자가 초대 사무총장으로 재직할 때(2011~2013년) 주한 러시아대사가 두어 차례 찾아왔다. 그는 러시아가 아시아 국가임을 강조하고 정상회의 또는 장관급 회의 참여 가능성을 비공식적으로 타진했다. 몽골 대통령 외교안보보좌관도 여러 차례 몽골의 정상회의 또는 장관급 회의 참여 가능성을 타진했다.

3국 협력체제는 아직은 한·중·일 간의 느슨한 결사체이지만 이 3자 플랫폼이 중심을 잡으면 여러 형태의 다자협력 그물망이 만들어질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계기가 되어 문재인 정부 당시 출범한 한·중·일·러시아·몽골·미국 6개국 참가 동북아방역보건협력체도 그러한 예다.

지난 6월 중순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한중일협력사무국 주최 ‘3국 협력 국제포럼’(IFTC)에서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은 한·중·일 정상회의 조속 개최 필요성을 언급했다. 한국은 차기 정상회의 의장국이다. 그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교역 질서 변화, 식량 에너지 위기, 디지털, 녹색 에너지 분야의 협력 방안 등 세 나라가 지혜를 모아야 할 아젠다가 많다고 했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맡은 김황식 전 총리는 3국 간 협력의 필요성을 100여년 전 안중근 의사가 주창한 동양평화론까지 연결했다. 안 의사는 3국이 공동 화폐를 쓰는 경제공동체 구상을 밝혔고, 3국 젊은이들이 서로 타국의 언어를 배울 것을 주창했다고 소개했다.

3국 정상회의는 2019년 12월 중국 청두 회의를 마지막으로 개최되지 못했다. 코로나19 상황과 한·일 경색 국면이 조기 개최를 막아왔다. 그러나 환경 탓만 할 수 없다. 중국은 이미 차기 정상회의 조기 개최에 동의했다.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축하 사절단으로 방한한 왕치산 부주석이 공개적으로 밝혔다.

남은 것은 일본이다. 개최국인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발목을 잡고 있는 과거사 관련 문제는 ‘김대중-오부치선언 2.0시대’를 열겠다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일본도 문재인 정부 당시의 한·일 관계 프레임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기시다 총리에게 한·중·일 정상회의는 포스트 아베 시대를 맞은 일본의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줄 좋은 기회다. 세 나라 모두 ‘미래’에 방점을 찍을 때가 됐다.

미·중 경쟁 완화하는 역할도

3국 정상회의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국 내에서 개최되는 첫 국제 행사가 될 것이다. 예상되는 기대 효과는 무엇인가? 첫째, 동북아에 긴장 완화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한·일, 한·중, 중·일 등 양자 관계 개선의 기회도 제공한다. 동북아에 모처럼 숨통이 트이는 기회가 한반도에서 마련되는 것이다.

둘째, 3국 간 안보 이슈를 포함해 경제 통상 등 현안의 모든 관심사를 논의하는 기회가 된다. 이 회의는 관례적으로 ‘3국 협력 현황 및 향후 발전방향’, ‘주요 지역 및 국제 문제’를 의제로 다루어 왔다. 코로나 팬데믹, 글로벌 공급망 파괴 등과 북한의 도발, 미·중 갈등이 중첩된 상황에서는 세 나라가 논의해야 할 아젠다가 차고 넘친다.

셋째, 북한 핵·미사일 문제에 대한 평가와 3국 간 입장 조율의 기회가 될 것이다. 북한 문제는 역대 정상회의가 모두 다룬 중요 아젠다였다. 특히 지난 7월 말 소위 전승절 기념행사에서 북한은 우리 정부와 미국을 향해 군사적 충돌을 불사하겠다는 거친 발언을 쏟아냈고, 최근에는 김정은 참수작전 조짐만 보여도 핵 공격을 하겠다는 핵 무력 법제화 조치까지 발표했다. 이럴 때일수록 북한 문제에 대한 3국의 이견 조율이 중요하다.

넷째, 한·중·일 협력은 미·중 간 극심한 경쟁을 완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한·중·일 간 기능적 지역 협력은 한·미·일 안보협력을 보완하는 효과가 있다. 한·중·일 3각, 한·미·일 3각은 한국에 둘 다 중요하다.

시진핑 주석, 3국 정상회의 참석해야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진핑 주석이 정상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측에서 총리가 참석하게 된 것은 초기 ASEAN 정상회의와 관련이 있다. 경제 문제 아젠다가 주였던 이 회의에 당시 중국 경제를 총괄하며 경제 차르로 불리던 주룽지 총리가 참석해 왔다. 그래서 이 회의에 초청받은 ‘+3 국가’들의 별도 만남에도 중국 측은 총리가 참석했다. 이제 3국 정상회의가 독자적으로 개최되고 또 동북아 지역의 가장 중요한 협의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았음을 고려할 때  중국 측에서도 국가주석이 참석하는 것이 옳다.

지금 중국에 한국과 일본만큼 중요한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동북아가 미·중 경쟁의 치열한 각축장이 된 상황에서 시진핑 주석이 정상회의에 직접 참여하여 한국과 일본에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 우리 정부는 이미 시 주석이 편리한 시기에 방한해 달라고 요청해 두고 있다. 시 주석이 양자 차원의 방한 후 3국 정상회의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조만간 확정될 시 주석의 3연임 이후 첫 외교 일정이 한국 방문이 되기를 기대한다.

신봉길 북한대학원대 석좌교수·한중일협력사무국 초대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