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문장으로 읽는 책

강은교 『꽃을 끌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꽃을 끌고

꽃을 끌고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 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 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 치는 혼령들이

강은교 『꽃을 끌고』

시 ‘진눈깨비’의 첫 연.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진눈깨비가 아니라 ‘비도 못 되고 눈도 못 된’, 조금은 무력하고 안쓰러운 진눈깨비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대여/ 어두운 세상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불꽃인 그대여.’

시와 산문을 곁들인 시·산문집이다. 이 시 뒤에 곁들인 산문에서 시인은 진눈깨비 같은 이들이 만들어낸 역사의 한순간을 떠올린다. 사소한 것들의 생명력이 시집 곳곳에서 읽힌다.

‘웃고 있네./ 눈도 감고 피도 식어서/ 피도 식고 뼈도 삭아서/ 그러나/ 아프지 않아서 웃고 있네.’ 이렇게 시작하는 시 ‘하관(下棺)’은 두 달 남짓 살다가 가버린 시인의 아이에게 바친 시다. 시인은 놀랍게도 아이를 보내면서도 생명을 본다. ‘아무도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네./ 무덤 속이든지 꿈 속이든지/ 쥐 이빨도 안 들어가는/ 손톱 속이든지/ 살아 있는 것은 언제나/ 다시 물이 되고 바람이 될 때까지/ 살아서// 하늘은 아직도 하늘/ 햇빛은 억만년을 햇빛으로/ 흐르고 있네, 우리는./ 잠들지 못할 거네, 우리는.’ 시인은 “‘하관’을 쓰던 순간 죽은 아이의 잠이 흙 속에서 꽃 뿌리를 타고 따스하게 흘러가는 것을 이해했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