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줄 마른 스타트업] 유동성 파티 끝나자 투자 절벽, 스타트업 도산·폐업 도미노…한국 미래 성장엔진 꺼져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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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어스앤컴퍼니 식품 정보 플랫폼 ‘엄선’의 서비스 중단 안내문. [사진 엄선 앱 캡처]

트라이어스앤컴퍼니 식품 정보 플랫폼 ‘엄선’의 서비스 중단 안내문. [사진 엄선 앱 캡처]

#2020년 설립된 스타트업 라이픽은 불과 2년여 만인 올해 7월 폐업했다. 라이픽은 이용자와 가까운 뷰티숍과 피트니스센터의 검색부터 예약·결제까지 한 번에 지원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앱은 출시 후 2주 만에 10만 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할 만큼 인기를 모았다. 제휴 매장 수도 1만4000여 곳에 달했다. 하지만 사세 확장 과정에서 공격적인 프로모션 등으로 비용을 많이 소모한 데 비해, 신규 투자 유치엔 난항을 겪으면서 자금난에 처한 게 컸다. 라이픽에 다니던 한 정보기술(IT) 개발자는 “회사의 성장성을 믿고 다녔지만 망하는 바람에 내 커리어도 망가졌다”며 “요즘이 과거 ‘닷컴 버블’ 붕괴 때와 비슷한 국면으로도 보여서 구직 기간이 길어지더라도 재취업은 스타트업 쪽으로는 안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창립 11주년을 맞은 토종 OTT (Over the Top·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업체 왓챠는 올해 상반기 1000억원 규모의 상장 전 투자 유치(프리 IPO)를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인력 감축과 자회사(블렌딩) 지분 매각에 나서면서 자금난 극복을 도모하고 있다. 웹툰·음원 등 다른 콘텐트 분야 개척을 노리던 신사업 추진도 잠정 중단했다. 왓챠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층 달아오른 OTT 시장 경쟁에서 넷플릭스·SK텔레콤(웨이브)·CJ ENM(티빙) 등 대기업들의 공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혁신에 매진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처럼 자금난이 발목을 잡고 있다. 왓챠의 한 직원은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스타트업 특성상 사업을 펼친 데 비해 투자를 못 받으면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며 “내년에도 이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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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억 이상 투자 유치 성공 1곳 뿐

한국의 신성장 엔진인 스타트업이 바짝 마른 돈줄로 인해 삐걱거리고 있다. 벤처캐피탈(VC)과 개인인 엔젤 등의 직접투자, 기업공개(IPO)나 장외주식 등의 간접투자 모두 예년보다 지지부진하다. 팬데믹 이후 2년 가까이 계속됐던 유동성 파티가 끝나면서 날아든 경제적 후유증이 스타트업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올 들어 우크라이나 사태와 공급망 대란 등 여파로 글로벌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위기가 본격화하면서 기준금리도 연일 거침없이 인상하고 있다. 스타트업을 덮친 자금난이 앞으로 수년간 이어질 공산이 크단 얘기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VC의 투자액은 4조61억원으로 지난해 하반기(4조6072억원)보다 6000억원가량 감소했다. 올 하반기 금리 인상 추세를 고려하면 올해 전체 VC 투자액도 지난해 7조6802억원을 크게 밑돌 것이 확실시된다. 실제로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집계에선 올 7월 국내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액이 8369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72.7%나 급감했다. 예년에 비해 대규모 투자는 줄어든 반면, 부담이 덜한 소규모 투자는 늘어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2000억원이 넘는 투자 유치에 성공한 스타트업이 지난해 상반기엔 눔코리아(6027억원)·비바리퍼블리카(4600억원)·티몬(3050억원)·뤼이드(2000억원) 등 4곳이었다. 올 상반기엔 버킷플레이스(2350억원) 단 한 곳뿐이었다. 이와 달리 스타트업에 대한 10억원 미만 소규모 투자 비율은 지난해 상반기 47.7%에서 올 상반기 53.3%로 높아졌다.

간접투자 상황도 안 좋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장외주식시장(K-OTC) 거래대금은 올해 들어 8월까지 6012억원으로 전년 동기(9889억원) 대비 40% 가까이 줄었다. 상장하지 않은 스타트업이 투자자 관심을 모을 기회를 그만큼 잃고 있는 것이다. 자본시장에서 스타트업 융성의 핵심 열쇠인 IPO도 올 들어 이어진 증시 한파에 직격탄을 입었다. 익명을 원한 VC 관계자는 “IPO가 임박한 스타트업은 기업가치가 수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요즘은 이들이 투자 유치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수천대 1의 청약 경쟁률을 기록할 만큼 활황이던 IPO 시장이 올 들어 급속히 쪼그라들면서 IPO가 투자자들의 수익 실현을 보장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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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코스피에 상장한, 카셰어링 및 모빌리티 플랫폼 분야 스타트업 쏘카의 흥행 실패가 단적인 예다. 상장 전 기관투자자 대상 수요예측에서 흥행에 실패하며 우려감을 키웠던 쏘카는 일반 청약 경쟁률이 14.4 대 1에 그치면서 우려를 현실로 바꿨다. 상장 후에도 주가가 2만8000원(확정 공모가)에서 한 달여 만에 1만5000원대로 40%이상 떨어지는 등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되고 있다. 쏘카는 올 초 롯데렌탈의 지분 인수에 기업가치가 1조3000억원대로 평가된 바 있다. 현재 시가총액이 5000억원대임을 고려하면 반 년여 만에 기업가치가 절반보다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이처럼 국내 스타트업은 규모와 업력 등을 막론하고 자금난에 신음 중이다. 그러면서 폐업과 서비스 중단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라이픽 외에도 미디어 액티비즘(행동주의) 분야 스타트업 닷페이스가 올 6월에, 빅데이터 기반 모바일 사용자 분석 업체 유저해빗이 8월에 각각 폐업했다. 9월엔 생선회 등을 당일 빠르게 배송하는 ‘오늘회’(오늘식탁)와 식품 성분 데이터를 분석해주는 ‘엄선’(트라이어스앤컴퍼니) 등의 인기 서비스가 중단 위기에 처했다.

닷페이스·유저해빗 등 잇따라 폐업

지난해 임직원 연봉 1200만원 일괄 인상으로 화제가 됐던 코스닥 상장사인 게임 분야 스타트업 베스파도 신작 흥행과 추가 투자 유치 실패로 경영난을 겪은 끝에 올 8월부터 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회생채권과 회생담보권 조사까지 마쳤고 11월 1일까지 회생계획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한국의 창업기업 생존율(5년차 기준)은 32.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평균치인 44.1%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양금희 국민의힘 의원실 집계). 앞으로가 더 문제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유동성이 넘치던 시기엔 앞다퉈 스타트업에 투자했지만,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 우려로 투자 규모는 점점 쪼그라들 것”이라며 “투자 혹한기에 스타트업의 줄도산과 줄폐업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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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유동성 파티가 스타트업 생태계에 ‘착시’를 일으키면서 위기를 키운 것도 짚어볼 만한 부분이다. 예컨대 올 들어 투자 혹한기에도 자율주행 분야 주요 스타트업 18곳(스트라드비젼 등)이 유치한 투자액은 8월까지 3905억원으로, 지난해 기록(2875억원)을 이미 넘어섰다(스타트업레시피 집계). 성장성을 확고히 인정 받는, 자율주행이라는 혁신 분야에선 예외적으로 돈줄이 마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달리 보면 지난해까진 적잖은 스타트업이 이렇다 할 혁신 기술이 없음에도, 단지 유동성 파티 국면에 힘입어 많은 투자를 받았지만 정작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내면서 위기를 자초했다는 얘기도 된다.

지난해 설립된 사이버 보안 분야의 스타트업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회사 기술력이 냉정히 봤을 땐 아직 특별할 게 없는데 (경영진이) 지난해 벤처 투자 붐에 (돈을 받으려고) 섣불리 창업한 감이 있다”며 “이제 추가 투자는 없고 투자자의 실적 압박만 거세지고 있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고 토로했다. 퍼스널 모빌리티 산업 성장에 획기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는 전동 킥보드 분야는 또 다른 예다. 2018년 설립된 올룰로의 공유 전동 킥보드 사업(킥고잉)이 인기를 모으자 수년간 다른 스타트업이 우후죽순 뛰어들면서 투자를 받았지만, 이후 차별화 실패와 성과 부재로 폐업 사례가 속출했다.

자리를 잡은 대형 스타트업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예컨대 신선식품 새벽배송으로 유통 업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마켓컬리의 운영사 컬리는 올 8월 한국거래소의 상장 예비심사를 통과해 상장을 눈앞에 뒀지만, 장외주식 시장에서 지난해 4조원대로 추산되던 기업가치가 2조원대로 반 토막이 난 상태다. 새벽배송을 지속했을 때 회사가 감당해야 하는 높은 인건비와 물류비 부담, 실제 만년 적자로 고전 중인 점, 이를 타개할 새로운 혁신 동력이 눈에 안 띄는 점 등이 요즘 같은 때 시장에 의구심을 더하고 있다. 지난해와 달리 허리띠를 졸라매고 냉혹해진 시장의 ‘옥석 가리기’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기업 규모를 막론하고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런 옥석 가리기가 중·장기적 관점에서 꼭 필요한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악화일로의 경제 여건 속에 국가 산업 경쟁력 유지를 위해선 스타트업 생태계 전체의 생존·혁신 동력을 지켜주는 데는 차질이 없어야 한다는 게 시장 전문가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전문가들은 몇 가지 해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민간 투자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세제 혜택 등 인센티브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지성배 벤처캐피탈협회장은 “현재 벤처펀드 출자 지분을 매각할 때 양도 차익에 대해 개인·기관투자자는 비과세 혜택을 받지만, 은행·증권·보험사 등 일반 기업은 못 받는다”며 “일반 기업에도 세제 혜택을 줘서 유보금이 스타트업에 활발히 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반 기업 쪽 세수 감소 효과보다 스타트업 융성으로 발생할 법인세 증가 효과가 더 크다는 목소리다.

일반 기업 벤처투자도 세제 혜택을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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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혹한기에도 주요 선진국처럼 민간이 주도하는 창업 생태계가 유지되도록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제도를 원활하게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CVC는 일반 기업이 사내에 보유하는 VC다. 기업이 유망한 스타트업을 발굴해 신사업에 진출하거나, 기존 사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활용한다. 한국은 지난해 말 일반 지주사의 CVC 보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등의 규제 완화를 시행했지만, 기존의 금산분리(금융·산업자본의 상대 업종 소유·지배를 금지하는 원칙) 규제에 익숙한 많은 기업은 여전히 눈치 보기에 그치고 있다.

맹주희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의 경우 전체 VC 투자에서 CVC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가까이에 달할 만큼 스타트업 융성에 CVC를 잘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한국도 아직 까다로운 CVC 설립 기준을 조정하는 등 규제를 더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직접투자 지원 확대도 절실하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매년 모태펀드(중소·벤처기업 육성을 위해 VC에 출자하는 방식의 펀드)에 예산을 배정해 여기에 나선다. 그런데 김회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10개 기관에 따르면 내년도 정부 편성 예산안 가운데 모태펀드 출자액은 7045억원으로, 기존 9378억원에서 25%나 줄었다.

정부는 지난해 IPO 성과가 좋았던 부처 모태펀드 예산을 집중 삭감해 다른 취약 분야로 돌린다는 입장이지만, 투자 혹한기에 따른 부작용 고려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모태펀드 예산 삭감이 꼭 나쁜 건 아니고 회수 재원을 고려해야 한다”면서도 “우수한 기업들마저 투자 분위기 위축으로 적절한 투자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지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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