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수익 몰아주는 수상한 용역 거래, 주주들 행동주의로 맞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07호 16면

중견기업 ‘터널링’ 분쟁

‘프라하의 해적’. 체코의 금융 전문가 빅토르 코제니의 별명이다. 1989년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1990년대 체코 국유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터널링’(자산·수익 이전) 방식으로 수조원대 자산을 빼돌리며 악명을 떨쳤다. 그는 1993년 사기 혐의로 기소된 뒤, 체코와 미국 정부로부터 국제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남아메리카 바하마로 도피한 그는 바하마 정부의 범죄인 인도 거부 속에 감금 생활을 이어가면서 프라하의 해적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로저 스탠리 당시 체코PwC 대표는 “터널링을 막기 위해선 내부 감시와 고발이 필요한데, 서로에 대해 알리길 꺼리는 체코의 문화적 특성 때문에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터널링(Tunneling)

기업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개인명의 혹은 차명으로 회사를 설립해 자산이나 확정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계약 등을 헐값에 넘기는 사기 행위를 일컫는 말로, 1990년대 체코에서 처음 사용됐다. 국내에서는 대주주 일가가 소유한 비상장사가 상장사와 내부거래를 맺어 이익을 이전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터널링’으로 경영 승계 재원 마련

내부 감시와 고발에 인색한 분위기 탓일까, 최근 중견기업들의 터널링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와 BYC, 아세아그룹 등 중견기업 상장사 2대주주들이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개인회사를 문제 삼으며 실력 행사에 나서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최대주주의 터널링 탓에 개인 투자자들 사이에서 ‘오르지 못할 주식’으로 불리던 곳이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경제개혁연대소장)는 “터널링의 원조인 체코와 달리 한국의 터널링은 눈에 보이는 자산을 이전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도덕적 잣대와 법률적 잣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며 “더구나 공정거래위원회 공시대상기업집단(총자산 5조원 이상)에 지정되지 않은 중견·중소기업에선 내부거래를 확인하기 어려워 그동안 견제를 받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공시대상기업집단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매년 국내 그룹사들을 대상으로 ‘대규모기업집단’을 지정하는데, 자산총액이 5조원을 넘을 경우 공시대상기업집단에 포함된다. 공시대상기업집단에 포함된 그룹 계열사는 비상장사라 하더라도 내부거래와 주식보유 변동 현황 등을 공시해야 한다.

내부거래

동일 기업 집단에 소속된 회사 사이에서 상품이나 용역·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식의 거래를 지칭한다. 지배구조상 총수가 동일하다는 점 때문에 특정 계열사에 이익을 몰아주는 도구로 악용되기도 하는데, 상표권이나 저작권료, 컨설팅 비용 등 가치를 특정하기 어려운 항목이 주로 활용된다.

실제로 국내 중견기업들은 눈에 보이는 자산을 빼돌리는 대신 용역 계약 등을 통해 수익을 이전하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라이크기획의 프로듀싱 용역 계약이 문제가 된 SM엔터테인먼트가 대표적이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가 지분을 100% 보유하고 있는 라이크기획은 SM엔터테인먼트의 음반기획 등 프로듀싱을 맡는 대신 매출액의 최대 6%를 인세로 받는 용역계약을 맺고 있다. 이 계약으로 라이크기획이 챙긴 인세는 SM엔터테인먼트의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386억원)의 30%가량인 114억원에 이른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에 SM엔터테인먼트의 2대주주인 얼라인파트너스에서는 지난 3월 정기 주총에서 표 대결을 벌인 끝에 감사 선임안을 포함한 제시 안건 모두에서 승리한 바 있다. 실력 행사에 성공한 얼라인파트너스는 9월 15일 계약 조기 종료를 검토하겠다는 SM 측의 답변을 받았다. 이 발표만으로 SM엔터테인먼트 주가는 다음날인 16일 18.6%나 급등했다.  다만, SM측은 얼라인파트너스에서 계약 종료를 확정해 공시해 달라고 한 지난 30일까지 추가 공시를 내놓지는 않았다.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 대표는 “국내 상장사들 가운데 대다수가 소수 주주의 권리를 무시하는 상황이다 보니 저평가된 곳이 굉장히 많다”며 “SM 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에서도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계속해서 주주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대다수 중견기업들이 터널링을 쉽게 포기하긴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많은 중견기업들은 승계를 위한 재원마련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유 부동산만 2조5000억원 규모로 알려진 ‘부동산 부자’ BYC에서는 한석범 BYC 사장과 친인척이 최대 주주인 신한에디피스와 신한방, 제원기업 등 비상장 회사가 문제가 되고 있다. BYC의 2대 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이런 개인 기업들이 BYC 등과 부동산 관리 등 용역계약을 맺고 이익을 가져가고 있다고 보고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한석범 BYC 사장과 배우자, 자녀 등의 가족회사인 신한에디피스는 지난해 말 기준 BYC 지분 18.43%를 갖고 있는 최대주주다. 한석범 사장의 장녀 한지원 이사의 개인회사인 제원기업도 올 들어 계속해서 BYC 지분을 장내매수하면서 올해 상반기에만 BYC 지분율을 0.27%에서 0.31%로 높인 상태다. 다만 BYC가 공시대상기업집단에 지정된 곳이 아니어서 내부거래 내용은 공시하지 않고 있다. BYC 관계자는 “세부적인 사항까지 확인해주기 어렵다”면서도 “내부 거래 계약 등은 규정에 맞춰 적법한 절차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트러스톤자산운용 측에서는 BYC의 부동산 위탁 계약 과정이 적법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회사 측에 관련 서류 확인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9월 16일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이사회 의사록 열람 허가를 받은 상태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이틀간 BYC 주가는 10% 넘게 상승했다. 이성원 트러스톤자산운용 부사장은 “BYC는 보유 부동산 가치가 2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시가총액은 2600억원에 불과하다”며 “주가가 자산가치의 10분의 1 밖에 안 되지만, 최대주주 입장에선 BYC가 배당을 높이면 소액 주주들에게도 이익을 나눠야 하는 탓에 가족들이 지분을 나눠가진 비상장 회사에 이익을 몰아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VIP자산운용과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아세아그룹도 마찬가지다. 아세아그룹에서는 오너 일가의 가족회사 삼봉개발에 그룹 계열사 소유인 강남구 역삼동 아세아타워 부동산 관리를 맡겼다. 경주월드의 위탁운용도 삼봉개발이 담당하고 있다. 그룹 지주사인 아세아의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아세아가 삼봉개발에 지급한 임대원가는 31억5700만원에 이른다. 이 금액은 삼봉개발이 지난해 거둔 순이익(31억3292만원)에 필적하는 규모다.

서비스 계약, 법적 대응 쉽지 않아

이렇게 거둔 이익은 배당으로 오너 가족들의 지갑에 꽂혔다. 삼봉개발은 지난 2018년부터 3년간 매년 24억원을 포함해 최근 5년간 총 90억원을 배당으로 지급했다. 같은 기간 당기순이익(110억원)의 81.5%를 배당으로 지급한 것이다. 2020년에는 순이익이 4억7486만원에 그쳤으나 배당총액은 24억원에 이른다. 벌어들인 돈보다 많은 금액을 배당으로 지급했다는 얘기다. 반면 아세아그룹의 지주사인 아세아의 배당성향(당기순이익 대비 배당금 비율)은 지난해 2.76%, 최근 5년간 6.83%에 불과하다. 상장사인 아세아 주주들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을 최대주주가 챙겨간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오너의 입김이 강한 국내 기업들은 관행적으로 터널링을 활용했으나 대기업들은 외국계 자본이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개선된 측면이 있다”며 “다만 시가총액이 상대적으로 낮은 중견기업들은 무풍지대였기 때문에 여전히 터널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중견기업이 쓰고 있는 터널링 수법인 관리·위탁운용 계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 법적으론 문제 삼기 쉽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용역·서비스 비용이 적절한지 판단하려면 기업 내부자료에 접근해야 하는데 외부인인 주주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내부 자료에 접근해도 법적으로 문제를 삼기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김우찬 교수는 “최대주주 입장에서는 법률전문가의 조언을 통해 법과 규제의 테두리를 넘지 않을 것”이라며 “문제의 본질은 기업 최대주주가 자신들이 가진 지분 이상의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니, 기존 제도 아래서 기업 이사회와 외부 감사 등 견제 역할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주자본주의가 자리 잡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남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주주가 이사를 선임하고 이사가 경영진을 선임하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창업자가 곧 주주이자 경영자였던 탓에 승계가 이어진 지금도 대다수 기업의 의사결정이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측면이 있다”며 “미국에서는 대주주와 관계된 거래는 이사회에서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고 회사와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승인하도록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