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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팅 한듯 정교한 파이프 그림이 이끄는 명상의 세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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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호 18면

전위적인 기하추상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승조 화백이 작업했던 기하추상 ‘핵’ 연작들. [사진 국제갤러리]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승조 화백이 작업했던 기하추상 ‘핵’ 연작들. [사진 국제갤러리]

둥그런 원통형의 파이프가 가로·세로·사선으로 나란하다. 캔버스 위에선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한 귀퉁이를 툭 치면 이 질서정연한 고요가 무너질 것만 같다.

10월 30일까지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승조 개인전 ‘LEE SEUNG JIO’의 풍경이다. 사람의 손으로 그렸다고는 믿겨지지 않는 이 그림의 주인공은 한국의 기하추상을 구축하는데 평생을 바친 이승조(1941~1990) 화백이다.

194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공간기에 가족과 함께 남하해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반에서 그림을 배웠고,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거쳤다. 62년에는 동급생이었던 권영우, 서승원 등과 함께 기존 미술 제도와 기득권에 반하여 ‘오리진’이라는 이름의 전위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승조 화백이 작업했던 기하추상 ‘핵’ 연작들. [사진 국제갤러리]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승조 화백이 작업했던 기하추상 ‘핵’ 연작들. [사진 국제갤러리]

자신만의 조형언어에 몰두하던 그의 작품에 원통형 파이프가 처음 등장한 것은 67년 시작한 연작 ‘핵’의 열 번째 작품을 통해서다. 그동안 원색의 띠 또는 세포가 분열한 듯 네모난 평면 도형들로 가득했던 캔버스에 둥그런 입체감을 가진 ‘파이프’가 등장한 것. 이후 본격적으로 파이프 형상에 집중한 그는 68년 ‘제1회 동아국제미술전’ 대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선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으며 서양화 부문 최고상에 추상화 작품이 선정되는 국전 역대의 최초 기록을 남겼다.

섬세한 붓질로 탄생한 3차원 입체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승조 화백이 작업했던 기하추상 ‘핵’ 연작들. [사진 국제갤러리]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승조 화백이 작업했던 기하추상 ‘핵’ 연작들. [사진 국제갤러리]

회화 속 파이프 형상은 레이저 프린팅이라도 한 듯 치밀하고 정교해 보이지만, 실은 작가가 일일이 손으로 작업한 노력의 결과다. 캔버스에 밑색을 칠해서 말리고 사포질을 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 직물이 가진 보슬보슬한 느낌을 갈아 없애고 금속성의 윤기를 입힌다. 이후 연필과 자를 이용해 스케치를 하고, 마스킹테이프로 선과 선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한 뒤, 납작한 붓으로 유화물감을 입힌다. 이때 붓 가운데 부분에는 밝은 물감을, 양쪽 가장자리엔 짙은 물감을 묻혀서 한 번의 붓질로 자연스러운 3차원적 입체감을 표현한다. 과감하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반복적 붓질로 완성된 파이프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시각적인 일루전(illusion·착각)을 느끼게 한다.

국제갤러리 윤혜정 이사는 “‘핵’ 연작은 당시 미술계에서 가히 혁명적이었다”며 “해방 이후 60~70년대까지 한국의 추상은 대담하고 거칠고 주관적인 태도가 잘 드러나는 앵포르멜 계열의 ‘뜨거운 추상’이 주였는데, 이승조 작가는 일체의 감정과 주관을 배제한 채 완벽히 기하학적 형상에 몰두한 ‘핵’ 연작을 통해 ‘차가운 추상’을 시도했고, 특히 기하추상 작업은 극히 드물어서 한국의 추상을 이야기할 때 이 작가는 독보적이고 선구적인 작가”라고 평했다.

‘이승조 개인전’은 9월 초 ‘키아프·프리즈 국제아트페어’ 개최 기간에 시작됐다. 해외에서 방한하는 수많은 미술관계자들을 맞으며 국제갤러리가 작심하고 준비한 전시다. 바로 이전에는 한국의 또 다른 추상화가 유영국 화백의 전시도 열었다. 윤 이사는 “해방 이후의 추상화는 당시로선 굉장히 전위적인 작품이었다. 당대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한국 작가들을 연구하다보니 추상작가들이 많이 눈에 띄었던 게 사실”이라며 “작고한 화가들의 작품은 누가 어떻게 새롭게 조명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국내외 미술관계자들에게 이런 좋은 작가가 있다고 알리고, 후속 연구가 계속 뒤따를 수 있도록 하자는 게 목표”라고 했다.

리드미컬한 일렁임, 그리고 명상

작업실에서 파이프 형상을 작업중인 이승조 화백의 모습. [사진 국제갤러리]

작업실에서 파이프 형상을 작업중인 이승조 화백의 모습. [사진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1, 2, 3관을 통틀어 전시된 30여점은 크기도 색도 다르다. ‘핵’ 연작 초기에는 다양한 원색도 사용했지만, 점차 갈색·회색·검정 톤이 캔버스를 덮으면서 ‘단색화’의 영역을 넘나든다. 한지와 나무에 그린 파이프들은 짙은 수묵화마저 연상시킨다.

특히 3관에서 마주보고 전시된 가로 길이 4미터가 넘는 대작들은 전혀 다른 분위기여서 놀랍다. 갈색 그러데이션으로 이뤄진 ‘핵 90-10, 90-11’의 파이프들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89)의 포스터를 볼 때처럼 금방이라도 리드미컬한 기계음을 낼 것만  같다.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파이프들이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실린더처럼 금방이라도 위아래, 좌우로 움직일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반대편에 걸린 ‘핵 78-20, 78-21’의 파이프들은 경계가 모호한 검정색으로 가득하다. 비스듬히 들어선 사선은 오래된 한옥 지붕의 검은 기와를 볼 때처럼 조용히 일렁인다.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을 모두 덮어버릴 만큼 거대한 침묵의 힘이 느껴진다.

이승조 회화에서 반복되는 파이프 형태는 후대 비평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평론가 이일은 “조형의 기본원리인 규칙적인 반복의 질서를 통해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말하는 ‘자기환원적 추상’, 다시 말해 ‘탈회화적 추상’의 세계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시한 것”이라며 회화 소재로서의 선과 색채의 앙상블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기계비평가 이영준은 “60~70년대의 급격히 산업화되고 현대화된 세상의 새로운 감수성에 대한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새로운 기계문명의 발전을 경험한 작가의 새로운 지각방식의 변화가 평면이라는 캔버스에 어떻게 표현되었는가에 방점을 둬야 한다는 얘기다.

생전에 이승조 화백은 파이프 형태의 의미에 대해 명확히 밝힌 적이 없다. 다만 그가 남긴 말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기차 여행중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얼핏 무언가 망막 속을 스쳐가는 게 있었다. 나는 퍼뜩 눈을 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마치 첫인상이 강렬한 사람에 대한 못 잊음과도 같은, 그 미묘한 감동에 휩싸여 집에 돌아온 즉시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마음에 남은 이미지를 조작한 결과 오늘의 파이프적인 그림을 완성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실은 이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하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놀라운 속도를 통해 기계문명의 발전을 실감할 테고, 누군가는 쏜살같이 흘러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까. 50여 년 전 그림인 ‘이승조 개인전’을 보며 ‘명상’과 ‘파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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