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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국인 쌀밥 먹지 말라” 들통나면 경제사범 엄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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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5〉

1935년 10월, ‘일본불교종파연합’ 대표단 환영식에 참모들을 대동하고 참석한 관동군사령관(앞줄 왼쪽 셋째). [사진 김명호]

1935년 10월, ‘일본불교종파연합’ 대표단 환영식에 참모들을 대동하고 참석한 관동군사령관(앞줄 왼쪽 셋째). [사진 김명호]

1932년 가을부터 일본이 만주(동북)에 파견한 무장 이민단은 파란이 많았다. 동북에 첫발을 디딘 날부터 동북인의 저항에 직면했다. 시도 때도 없이 중국 항일군민(軍民)의 습격을 받았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적(馬賊)의 후예들도 만만치 않았다. 불시에 이상한 무기를 들고 몰려와 양식과 무기는 물론 여자까지 탈취해 바람처럼 사라졌다. 일본도 가만있지 않았다. 미친 듯이 동북의 항일군민을 도살했다. 무장이민도 그치지 않았다. 1936년 봄까지 5년간, 다섯 차례에 걸쳐 무장이민을 만주에 정착시켰다.

“만주 일본인 500만 명 돼야 완벽한 통치”

만주국 시절 선양(瀋陽)의 중국인 빈민촌. [사진 김명호]

만주국 시절 선양(瀋陽)의 중국인 빈민촌. [사진 김명호]

1936년 2월 말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를 계기로 일본의 정당정치는 막을 내렸다. 일본 군부와 뜻을 함께하는 외무상 히로다 고키(廣田弘毅)가 32대 총리를 겸직했다. 히로다는 이민을 통한 동북 침략 정책의 신봉자였다. 대규모 이민을 국책(國策)으로 못 박았다.

같은 해 4월 관동군이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에서 ‘이민회의’를 열었다. 지난 5년간의 무장이민 경험을 검토한 후 합의를 했다. “소규모 무장이민은 성공했다. 대규모 농업이민도 불가능하지 않다. 20년 후 만주 거주 일본인이 500만 명은 돼야 완벽한 통치가 가능하다.” 하얼빈(哈爾賓) 거주 여교수 한 명이 500만이란 숫자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500만명은 보수적인 숫자다. ‘이민회의’ 당시만 해도 동북에 있는 일본인 숫자는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20년 후 이민 외에도 상당한 숫자의 군인과 정부 지원, 교사, 상인, 기술자,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1000만명 정도는 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민회의’ 9년 후 일본 패망 시, 동북에 있던 일본이민은 166만명이었다. 그중 농업이민은 32만명 10만6000가구에 불과했다. 일본의 원래 계획은 100만 가구였다.”

경작 중인 만·몽개척청소년의용군. [사진 김명호]

경작 중인 만·몽개척청소년의용군. [사진 김명호]

이민을 국책으로 정한 일본군부는 무장이민을 농업이민으로 전환했다. 재향군인도 일반농민으로 대체했다. 1939년부터 이민이라는 명칭을 없애버렸다. 일본 영토에 일본인이 가는 것은 이민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이민을 개척민으로, 이민단은 ‘개척단’이라 개칭했다. 이민사업도 ‘개척사업’으로 탈바꿈시켰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농민도 징집대상이 됐다. 군수산업도 노동력 결핍에 시달렸다. 만주에 보낼 개척단이 목표의 10.9%로 급감했다. 일본은 문제해결에 골몰했다. 16세부터 19세까지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만·몽개척청소년의용군(滿蒙開拓靑少年義勇軍)’을 공모했다. 여의치 않자 연령을 낮췄다. 14세에서 15세까지도 억지로 긁어모았다. 3개월간 사찰에서 정신교육 받고 만주로 이동해 3년간 혹독한 군사훈련 마친 후 개척단에 편입된 8만여명의 ‘만·몽개척청소년의용군’은 개척단 내의 특수집단이었다. 개척단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관동군의 보충병 역할을 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에 진입하자 전원이 ‘청소년의 용대’를 편성해 전투에 참여해 1/3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939년 이민단 ‘개척단’으로 이름 바꿔

만주국은 다민족 국가였다. 상품도 영·일·중·러 4개국어를 표기했다. [사진 김명호]

만주국은 다민족 국가였다. 상품도 영·일·중·러 4개국어를 표기했다. [사진 김명호]

관동군은 개척단을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했다. 최전방인 소련국경 지역에 40%를 상주시켰다. 국경지대의 일본화가 최종목표였다. 창바이산(長白山)과 싱안링(興安嶺), 쑹화(松花)강 일대의 평원지역은 항일무장세력의 상습 출몰지역이었다. 항일집단과 동북 평민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개척단의 50%를 배치했다. 나머지 10%는 남만주철도(만철) 철로 연변에 터를 잡았다. 수탈한 물자의 원만한 운송 때문이었다. 개척단은 염가로 토지를 매입했다. 수년 만에 동북토지의 1/10을 점거했다. 만주가 일본의 모범농촌으로 변할 징조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상황이 변했다. 전선이 길어지자 일본 정부는 만주 개척민이 누리던 병역 혜택을 폐기했다. 16세부터 45세 이하의 개척민을 군에 징발했다. 중국군과 전투가 치열한 내지의 남방 지역에 배치했다. 개척단은 장년의 노동력을 상실했다. 토지를 중국 농민들에게 경작시켰다.

일본은 중국인이 쌀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먹다 들통나면 경제사범으로 다뤘다. 하얼빈 인근의 대형 개척단 소재지에 유전되는 말이 있다. “중국 노동자를 고용한 인성 좋은 개척민이 있었다. 노동자에게 항상 쌀밥을 주며 술까지 권했다. 노동자는 술이 약했다. 하루는 귀가도중 길에서 먹은 것을 토했다. 지나가던 만주국 말단관원이 걸음을 멈췄다. 쭈그리고 앉아 토사물을 검사했다. 쌀이 발견되자 쪼르르 파출소로 달려갔다. 손짓 발짓 해가며 순사에게 일러바쳤다. 농민은 냉수세례 받으며 채찍으로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졌다. 미모의 부인이 순사에게 선심 쓴 덕에 벌금만 내고 겨우 풀려났다. 비슷한 일이 많았다.”

1945년 8월 9일 0시 10분 바실리예프가 지휘하는 소련 극동군 150만명이 4000㎞에 달하는 소·만 국경을 넘어 동북에 진입했다. 3일 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은 소련의 진군 속도에 놀랐다. 소련을 겁주기 위해 이미 망한 나라에 한 개를 더 투하했다. 일본 패망은 개척단에겐 청천벽력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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