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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판을 바꿨다, 영화 '한산'에 나오는 이 고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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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호 25면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19〉 웅치·이치

웅치(熊峙)는 어디인가. 웅치는 725만 관객을 모은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에 나온다. 임진왜란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고개다. ‘육지의 한산대첩’으로 불린다. 웅치는 호남을 지킨 임진왜란의 성지(聖地)다. 원불교 성지도 근처에 품은 웅치는 이제는 트레킹과 라이딩·드라이빙의 성지가 됐다.

웅치는 전북 완주군과 진안군을 잇는 고개다. 사진 앞 능선을 가로지로는 고개는 덕봉길로 옛 웅치라고도 부르며, 뒤의 익산-포항고속도로가 보이는 곳에는 현재의 웅치, 즉 곰티재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덕봉길을 임진왜란 웅치전투의 주 전투지로 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웅치는 전북 완주군과 진안군을 잇는 고개다. 사진 앞 능선을 가로지로는 고개는 덕봉길로 옛 웅치라고도 부르며, 뒤의 익산-포항고속도로가 보이는 곳에는 현재의 웅치, 즉 곰티재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덕봉길을 임진왜란 웅치전투의 주 전투지로 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 정여립 사건 탓 전북 의병 활동 위축

“어휴 말도 마요. 고개가 얼마나 험한지 명절 때마다 기우뚱거리는 버스를 타고 고향인 진안으로 넘어가는 게 고역이었습니다.”
지난달 6일. 전주에서 일하는 전모(57)씨는 양손에 트레킹용 스틱을 들고 곰티재(485m) 고갯마루를 찍고 다시 완주 쪽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곰티재는 웅치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평일에 이곳을 찾은 게 (기자에게는) 오히려 다행”이라며 “주말이면 트레커·라이더·드라이버가 몰려 유난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전북 진안군 부귀면 신정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현) 웅치는 임진왜란의 격렬한 전투지로, 당시 수많은 사람이 쓰러져 묻혔지만 지금은 트레킹 장소로 인기다. 김홍준 기자

전북 진안군 부귀면 신정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현) 웅치는 임진왜란의 격렬한 전투지로, 당시 수많은 사람이 쓰러져 묻혔지만 지금은 트레킹 장소로 인기다. 김홍준 기자

웅치는 전북 진안군과 완주군 사이의 고개다. 고개가 껴안고 있는 만덕산(762m)과 부근 지형이 웅크린 곰의 형상이라 이름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옛 웅치’가 있고, ‘현재의 웅치’가 있다. 1910년 일제가 낸 신작로가 현재의 웅치다. 보통 곰티재로 부른다. 인근에 덕봉마을 옛길(덕봉길)과 적천치 등 또 다른 고갯길 두 곳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덕봉길을 웅치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해져 '옛 웅치'라고도 한다.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에서 바라본 만덕산과 그 일대는 마치 곰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웅치(熊峙)라고 이름 붙었다고 한다. 김홍준 기자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에서 바라본 만덕산과 그 일대는 마치 곰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웅치(熊峙)라고 이름 붙었다고 한다. 김홍준 기자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현) 웅치를 넘어가는 길 대신 들어선 모래재로 고갯마루에서 한 차량이 완주 방면으로 내려서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현) 웅치를 넘어가는 길 대신 들어선 모래재로 고갯마루에서 한 차량이 완주 방면으로 내려서고 있다. 김홍준 기자

곰티재는 진안 부귀면 세동리 우정·부암마을과 완주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다. 1872년 ‘전주지도’에는 웅치험애(險隘·가파르고 험함)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전주에서 온 고한식(66)씨가 곰티재에서 들려준 '사고사례'는 이렇다. "1966년 6월 6일이었나. 진안에서 전주로 가던 버스가 곰티재를 넘다가 200m 아래로 굴렀다지. 17명이나 죽었어. 대부분 중·고등학생이었지. 이듬해에는 결혼식 하객을 태운 버스가 굴러떨어지기도 했어." 좀 더 낫다는 모래재(1972년)와 보룡재(1997년)에 전주와 진안을 오가는 도로가 생겼다. 하지만 고씨는 "여전히 눈알이 핑핑 돌 정도로 굴곡이 심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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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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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년 전 임진왜란. 왜군은 고씨가 걷고 있던 이 고개를 넘봤다. ‘웅치전투’다. 한산대첩과 같은 날인 1592년 7월 8일(음력) 벌어졌다. 진안에서 왜군이 몰려왔다. 지금 사계절 비경을 자랑하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다진 흙 밑으로 그들의 수만 발자국이 찍혔을 테다. 『난중잡록』이 전한다. ‘(왜적이) 산 중턱을 육박하여 여러 부대로 나누어 들어와 싸우는데 흰 칼날이 번쩍이고 탄환이 우박 쏟듯 하였다.’

전북 완주군에서 모래재로를 이용해 진안군으로 넘어가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만난다. 가을을 비롯해 계절의 절경을 선사한다. 사진 왼쪽 얕은 산이 웅치 일대다. 김홍준 기자

전북 완주군에서 모래재로를 이용해 진안군으로 넘어가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만난다. 가을을 비롯해 계절의 절경을 선사한다. 사진 왼쪽 얕은 산이 웅치 일대다. 김홍준 기자

일본군은 전라도의 수부(首府·감영이 있던 곳)인 전주를 접수해야 했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을 함락하고, 상륙 20일 만에 한성까지 무너뜨린 일본군은 임진왜란의 장기화를 예상하고 조선을 분할통치하려고 했다. 호남을 놔둘 수 없었다. 전주 감영의 수장, 전라관찰사 이광(1541~1607)은 극적인 행보를 보인다.

이광은 군사를 움직이라는 주변의 간청을 듣지 않았다. 왕의 명령이 떨어져서야 근왕군(勤王軍)을 편성해 한성으로 향했지만, 한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에서 말을 돌렸다. 다시 왕의 명령으로 군사를 ‘긁어모아’ 북으로 향했는데, 오합지졸 6만 군사는 1500명의 왜군에게 용인 광교산 근처에서 유린당했다. 이는 영화 ‘한산’에서도 언급하는 내용이다.

이광이 주저했던 이유는 ‘정여립 사건’ 때문으로 보인다. 김종수 군산대 사학과 교수는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라고도 부르는 정여립 사건은 당시 호남, 특히 전북 지역을 초토화했는데, 이광은 이로 인해 절대 권력자가 허가하지 않으면 자신의 관할구역인 전라도를 벗어나는 군사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인이었던 정여립(1546~1589)은 동인으로 갈아탔다. 정여립은 서인의 공세에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낙향했다. 전주와 진안을 아울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활을 쏘고는 했다. 왜구를 격퇴했다. 사람을 모으고, 무예를 다지니, 서인의 공격 빌미가 됐다. 김 교수는 “혁명으로 개국하고,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이은 조선에서는 다른 혁명과 모반을 막으려 사병제도를 없앴다”며 “그런데 정여립이 사실상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다는 건 서인들이 그에게 역모죄를 씌울 좋은 구실”이라고 말했다.

1000여 명이 처형됐다. 호남이 흔들렸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을 정탐한 일본 승려 겐소(玄蘇)가 “조선은 기축옥사로 원망의 소리가 가득해 한번 치기만 하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조선 최초의 사병으로 볼 수도 있는 정여립의 조직은 모반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다. 이광도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김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전북의 의병 활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뜸했던 이유도 정여립 사건으로 인한 인물난과 조직 기반의 붕괴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충남 금산을 손에 넣은 왜군은 전북으로 진격했다. 무주·용담·진안이 떨어졌다. 곧바로 전주로 향하는 관문, 웅치였다. 김 교수는 "이광은 관군과 의병을 신속하게 배치하는 등 이전과 달리 사력을 다했다"고 말했다. ‘동이 틀 무렵 왜적 선봉 수천 명이 깃발을 등에 꽂고 우리 진 앞으로 들어오는데 고함이 하늘에 잇닿고 쏘는 탄환이 비 오듯 하였다…힘이 다 된 황박은 화살도 떨어지자 무너지며 나주(판관 이복남의) 진영으로 갔다…나주의 진 역시 무너졌다. (김제군수) 정담은 … 육박전을 벌이다 죽었다. 이복남 등은 싸우면서 후퇴하여 전주 동쪽 안덕원에 주둔했다(『난중잡록』).’

안덕원에서 다시 접전이 벌어졌다. 왜군은 금산으로 물러났다. 하태규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웅치전투는 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이어지는 안덕원 전투와 함께 호남 방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달 7일. '옛 웅치'로 부르기도 하는 덕봉길(부귀면 세동리 신덕마을~소양면 신촌리 두목마을)에서 웅치전적지보존회에서 세운 세 개의 푯말을 만났다. 웅치전투 세 곳의 방어진지를 가리키는 내용이었다. '현재의 웅치'인 곰티재 고갯마루에는 웅치전적비가 있다. 그곳에서 지난 8월 5일(전투가 벌어진 음력 7월 8일) 웅치전투 기념식이 열렸다. 헷갈린다.

전북 진안군 부귀면 신덕마을에서 완주군 소양면 두목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덕봉길에 있는 웅치 제3방어진지 푯말. 진천골 등 군사용어에서 따온 지명 이름이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덕봉길이 임진왜란 웅치전투의 주무대라고 보고 있다. 김제군수 정담이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김홍준 기자

전북 진안군 부귀면 신덕마을에서 완주군 소양면 두목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덕봉길에 있는 웅치 제3방어진지 푯말. 진천골 등 군사용어에서 따온 지명 이름이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덕봉길이 임진왜란 웅치전투의 주무대라고 보고 있다. 김제군수 정담이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김홍준 기자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웅치(곰티재) 고갯마루의 웅치전적비. 김홍준 기자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웅치(곰티재) 고갯마루의 웅치전적비. 김홍준 기자

하 교수는 “웅치 일원의 세 고갯길 중 덕봉길 일대가 웅치전투의 주요 전장으로 추정된다”며 “이 지역에는 진친골·왜장바위 등 전투와 관련된 지명이 있고, 성터·서낭당·진지터와 전사한 군사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 교수는 또 “실제 전투는 웅치 일원의 세 고개 전역에서 전개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난중잡록』에서는 ‘왜군이 여러 부대로 나누어 들어와 싸우는데…’라며 전투가 폭넓게 전개됐음을 표현하고 있다.

웅치전투는 임진왜란 초기에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던 조선이 육상에서 거둔 실질적 첫 승리였다. 동시에, 호남을 지켜냄으로써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두목마을 쪽에서 바라본 덕봉길(옛 웅치길) 고갯마루. 급조한 산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덕봉길이 임진왜란 웅치전투의 주무대라고 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전북 완주군 소양면 두목마을 쪽에서 바라본 덕봉길(옛 웅치길) 고갯마루. 급조한 산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덕봉길이 임진왜란 웅치전투의 주무대라고 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의병장 황박(?~1592)은 영화 ’한산‘에서 웅치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이후에 벌어지는 이치(梨峙·배티재·349m, 충남 진산군 묵산리~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전투에서 전사했다. 또 ‘한산’에서는 이순신이 있던 여수의 전라좌수영을 육지와 해상 양면으로 공격하기 위해 일본군이 웅치를 넘는다고 했다. 하지만 여수와 웅치의 거리는 직선상으로 130㎞나 된다. 같은 날(7월 8일) 벌어졌지만 동시에 작전을 펼칠 거리가 아니다. 극적 전개를 위해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권율장군 이치대첩비. 김홍준 기자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권율장군 이치대첩비. 김홍준 기자

국도 제17호선이 뚫리면서 충남 금산과 전북 완주를 잇는 이치 고갯마루도 도로 위로 올라왔다. 옛 이치 길은 사진 왼쪽의 대둔산휴게소 아래에 있다. 김홍준 기자

국도 제17호선이 뚫리면서 충남 금산과 전북 완주를 잇는 이치 고갯마루도 도로 위로 올라왔다. 옛 이치 길은 사진 왼쪽의 대둔산휴게소 아래에 있다. 김홍준 기자

#일본, 일제강점기 때 권율전적비 파괴

“우리도 우리지만 전주성도 걱정입니다.” 영화 ‘한산’에서 안성기가 연기한 광양현감 어영담(1532~1594)이 이순신(박해일 분)에게 말한다. 일본군은 전주를 다시 공략했다. 1592년 8월 17일(전투 날짜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이치에서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왜군을 맞이했다. ‘황진은 용맹이 으뜸이었는데, 돌격전을 벌이다가 적의 탄환에 맞았다…권율이 칼을 빼 호통치며 독전하니, 사졸들이 모두 용감하게 달려나가 일당백으로 싸워 이겨냈다(『재조번방지』).’

이기복 충남 금산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정유재란 때 왜군이 권율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이치전투는 일본군에게 큰 패배였다”며 “일제 강점기에 고종 때 세운 권율이치전적비를 파괴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말했다. 현재 권율이치전적비는 옛 이치 길을 바라보고 있다. 황진·황박과 항왜장수 김충선의 비석은 국도 제17호선에 난, 대둔산(878m)이 보이는 새로운 이치 고갯마루에 있다.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권율장군 이치대첩비는 고종 때 만들어졌으나 일제가 강점기 때 파괴했다고 한다. 그 일부가 남아있다. 김홍준 기자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권율장군 이치대첩비는 고종 때 만들어졌으나 일제가 강점기 때 파괴했다고 한다. 그 일부가 남아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달 6일. 월상리에서 곰티재 고갯마루를 찍고 다시 걸어 내려오던 김재근(68·전주)씨가 칡꽃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다. 다른 곳보다 한 달이나 늦은 개화다. 동행하던 김수현(68·전주)씨는 “곰티재는 꽃 피는 것과 얼음 녹는 것은 두 박자 느리고, 단풍 드는 것과 눈 오는 것은 한 박자 빠르다”고 말했다. 예전 완행버스가 다녔다면서 길은 흙과 자갈 뒤범벅이다. 김재근씨는 “아스팔트라도 깔렸다면 이런 발 맛은 못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현재의 웅치, 곰티재에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인명이 묻혔지만 지금은 트레킹 장소로 인기다. 김홍준 기자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현재의 웅치, 곰티재에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인명이 묻혔지만 지금은 트레킹 장소로 인기다. 김홍준 기자

만덕산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고갯길 옆구리를 친다. 절벽으로 떨어지지 말라고 1960년대에 세운 방호벽을 끼고 자동차가 지나간다. 자전거 라이더가 엉덩이를 들고 힘을 낸다. 이들은 다른 이들이 그랬듯, 곧 의기양양하게 솟은 1㎞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밑에서 잠시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군 수천, 수만 명이 몰려오던 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사라진 길.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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