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전쟁터로 끌려가” 한국 체류 러 청년들 잠 못 이뤄

중앙선데이

입력 2022.10.01 00:01

업데이트 2022.10.0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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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호 06면

푸틴 예비군 동원령 파장

러시아군에 징집된 한 청년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버스 창문을 사이에 두고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러시아군에 징집된 한 청년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버스 창문을 사이에 두고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지난 8월 말 한국에 온 비탈리(34)는 서울 구로동 일대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는 러시아인이다. 당장은 60일 단기 체류 비자로 머물고 있지만 조만간 장기 취업 비자를 받아 한국에 안정적으로 거주하며 일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최근 그는 불안감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예비군 동원령을 내리면서 언제 징집될 지 모르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는 “벌써 고향 친구 두 명이 전쟁터로 끌려갔다”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인 뒤 “한국에 더 머물고 싶은데…. 러시아에 가면 다시는 한국에 올 수 없을 것”이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러시아어학과 대학원에 다니는 지오니시야(29)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러시아에서 군 복무와 학사까지 마치고 2018년 한국으로 유학 온 그는 준비 중인 석사 논문도 마치지 못한 채 전장으로 끌려가게 될까 걱정이 태산이다. 학생은 동원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란 러시아 정부의 당초 발표와 달리 재학 중인 청년들도 속속 징집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초조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온갖 고생 끝에 한국의 대학에서 쌓은 연구 성과와 경험들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라며 “한국에 있는 러시아인들에겐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는 게 답답할 뿐”이라고 토로했다.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할 예비군 동원령을 선포한 뒤 한국에 체류 중인 러시아인 노동자와 유학생들의 불안감이 날로 커지고 있다. 징집 통보가 나오면 곧바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데다 국내 병역법상 징집 대상자 신분으로는 비자 연장도 사실상 불가능해지 때문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장·단기 체류 중인 러시아인은 2만1326명으로 유럽 국가 중 가장 많았다. 이 중 남성은 1만849명으로 징집 대상인 20~30대가 절반 이상(5317명)을 차지했다. 당초 7000명대였던 국내 체류 러시아인은 2014년 한·러 비자면제협정이 발효되면서 꾸준히 증가해 2017년 2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최근 동원령이 전격 발표되자 서로 안부를 묻고 징집 관련 정보를 주고받는 등 크게 술렁이는 모습이다.

러시아 청년 노동자들의 신분이 불안정해지면서 이들이 많이 근무하는 건설 현장이나 공단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당장 일손 부족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기도 안산에서 인력사무소를 운영하는 임모씨는 “불과 2주 전만 해도 러시아 남성은 시급 1만원, 여성은 9160원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지난주 후반부터 러시아인 노동자가 급격히 줄더니 이번 주엔 시급이 1만5000원까지 뛰었다”며 “이 액수를 불러도 거래처 공장에 파견할 사람을 구할 수 없어 난리”라고 구인난을 호소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외국인 유학생이 많은 대학가에서도 러시아 학생들이 징집을 피해 몸을 숨기며 불법 체류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외국인 학생이 많은 서울의 한 대학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 초기에도 중국으로 돌아가길 거부한 중국인 유학생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 대학들이 난처한 입장에 처하곤 했다”며 “러시아 유학생들도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잠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걱정했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K-팝 아이돌을 육성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도 불똥이 튈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년간 연예 기획사에서 외국인 가수 후보를 발굴해온 한 관계자는 “러시아 시장을 겨냥해 러시아 청소년들이 포함된 K-팝 아이돌 그룹을 기획했는데 결국 접기로 했다”며 “군 동원령까지 나온 마당에 러시아 출신 멤버를 내세우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판단”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형 기획사마다 러시아나 옛 소련계 국가 출신 연습생들을 많이 키워왔는데 최근엔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모두들 몸을 사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처럼 국내 체류 러시아인들의 불안감이 커지면서 비자 연장 등 이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분쟁이나 전쟁 국가의 국적을 가진 국내 체류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인도적 지원 대책을 꾸준히 시행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지난 3월엔 국내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임시 체류 비자를 발급해 취업과 학업 활동을 보장해 주기도 했다. 2021년에도 미얀마 군경의 시위대 폭력 진압 사태 후 국내 체류 중인 2만5000여 명의 미얀마인에게 임시 체류 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국내 체류 러시아인에 대한 인도적 지원 방안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선 ‘전쟁 가해국’인 러시아의 국민을 지원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경기도 내 주한 러시아 교민회를 이끌고 있는 알렉세이(42)는 “한국 정부가 러시아 침공에 비판적이란 이유로 한국에 있는 러시아인마저 외면하는 것은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보더라도 차별적 대응”이라며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그는 “하지만 지원을 요청했다가 괜히 피해만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들 극도로 조심하는 모습”이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국내 인권 단체 등도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할 때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 196개국이 협정을 맺고 있는 국제인도법(IHL)도 무력 충돌에 직접 가담하지 않는 자는 국적에 대한 차별 없이 인도적 보호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만큼 국내 체류 러시아인들도 이에 따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징집을 거부할 경우 난민 자격 등 국내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 인도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미 유럽연합(EU)도 동원령을 피해 탈출하는 러시아인들을 적극 수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상황에서 우리도 인도적 지원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국제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는 “국내 체류 러시아인의 경우 자국 전쟁의 상흔에 더해 난민 거부라는 두 번째 상처, 그리고 불안한 신분 속에서 감내해야 하는 부당한 처우 등 삼중고를 겪게 될 우려가 크다”며 “정부도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이들이 아무런 명분도 없는 전쟁에 끌려갈 것이란 두려움 없이 한국에 머무를 수 있는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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