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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의 영국과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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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엘리자베스 여왕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떠났다. 그가 보여준 절제력, 품위, 헌신, 그가 누렸던 영광과 대중의 존경, 그가 앉았던 왕좌의 무게와 길이는 이 시대의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것이었다. 주영대사 시절 그와 여러 기회에 만나 나눈 짧지만 편안했던 대화, 환하고 우아한 미소는 잊을 수 없다.

영국은 위대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영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면 오늘날 인류사회가 누리는 풍요와 번영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하는 나라다.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제도를 발전시켰으며, 오늘날 인류의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과학기술의 발명과 산업혁명, 인류를 오래 괴롭혔던 역병들로부터 벗어나게 한 예방의술 모두 거기서 시작해 개화한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 지구촌 대중이 즐기는 축구, 골프, 하키, 럭비 등 스포츠도 영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해가 지지 않은 역사상 최대제국을 건설해 세계질서를 주도했으며 문학, 지성, 예술, 금융, 언론, 교육, 탐험, 경제학, 역사학, 물리학, 지리학, 인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수 많은 기라성 같은 인물을 배출한 나라다.

영국은 위대한 역사를 가진 나라
인류의 오늘날 번영에 절대 기여
원천은 사회적 기풍과 사람의 힘
한국 미래도 사람과 기풍에 달려

영국은 유럽대륙과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불과 20마일 떨어져 있는 작은 섬나라다. 대륙에서 절대 강자가 부상해 해협을 건너는 것을 늘 경계하고 제어하려 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의 군사도 해협을 건너지 못했으며 비스마르크의 외교와 군대도 영국을 넘보지는 못했다. 지난 500년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던 영국의 지위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으로 입은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이후 식민지들의 독립을 허용하면서 1931년 56개국으로 구성된 영연방을 구성해 여전히 국제외교와 질서를 주도하고 경제적 유대를 유지하려 했다. UN을 제외하고 5대양 6대주에 구성원을 가진 기구는 오늘날에도 영연방밖에 없다. 이 중 호주, 캐나다 등 14개국에서는 여왕이 국가원수로 군림해왔다.

영국이 이런 나라로 발전하게 된 요인들은 무엇이었는가?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영국인들의 개방성, 포용성, 용기, 실용주의, 합리적 토론문화, 법치, 그리고 지배 엘리트들의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결과로 보인다. 무엇보다 영국은 지배층이 스스로 개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없이 왕정을 유지하며 민주주의를 선도하게 되었고, 동시에 영국인은 아직도 시민(citizen)이 아닌 신민(subject)으로 남아있다. 영국인들은 보수와 개혁의 절충을 실용적 관점에서 실천해 왔으며 디지털시대에 옛 전통을 꿋꿋이 지키면서도 현대예술의 최첨단을 열어왔다. 트러스 총리 취임 직후 네 명의 주요 장관을 모두 이민족 출신으로 채웠듯이 세계화 시대의 과제인 다문화 융합도 가장 앞서 수용해 나가고 있다

2차 대전후 영국은 세 개의 축을 기반으로 대외전략을 구사해 왔다. 첫째는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과의 특별한 파트너십, 둘째는 영연방의 수장국, 셋째는 유럽연합의 주도국 역할이 그 것이다. 이 세 축을 지렛대로 삼아 축소된 경제력과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세계 문제에 영향력을 지속해 왔다. 여왕의 서거는 이러한 시대가 이제 끝나가고 있음을 상징하며 영국과 세계에 새로운 과제를 남겨놓고 있다. 이미 세번째 축은 브렉시트로 무너졌다. 56개국으로 구성된 영연방 수장과 14개국의 국가원수 역할이 찰스 왕 시대에도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이 중 적지 않은 나라들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으며 개도국 구성원들에서는 과거와 같은 영국의 원조와 보호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볼멘소리들이 높다. 스코틀랜드의 독립 여론도 줄기차다. 가장 일관되게 지속되었던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는 미국의 상대적 입지가 쇠퇴하고 미중 갈등이 심화하면서 동반자로서의 역할 역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영국의 영고성쇠를 보며 한국의 미래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땅 덩어리는 한반도의 크기와 거의 같다. 인구는 남북한 인구를 합친 것보다 작다. 그러한 나라가 세계 최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그 사회의 기풍과 사람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사람의 힘이라면 한국도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정보흡수력, 글로벌감각, 지식수준에 있어 세계 어느 젊은이들 못지 않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융합시켜 새로운 문명의 길을 열어나가기에 한국만큼 좋은 역사적, 지리적 입지를 가진 나라도 없다. 경제적 기반도 이제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

지금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이 땅에 새로운 사회기풍이 일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개방과 포용, 정직, 합리적 토론문화, 배려와 협력, 정책과 제도에 대한 실용적 접근방식을 우리 사회의 전통으로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 법치를 확립하되 과거의 갈등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통한 일관된 대북정책으로 한반도 통일기반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 역사의 기운은 고정되지 않고 옮겨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런 사회기풍을 만들기 위한 걸음을 내디뎌야 하며 그렇게 하면 한국의 미래는 밝을 수 있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