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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한슬의 숫자읽기

하수구의 빅데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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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한슬 약사·작가

박한슬 약사·작가

최근 방송인 돈스파이크가 필로폰 투약 혐의로 체포됐다. 다른 마약 피의자를 수사하던 중 그의 투약 사실이 경찰 수사망에 포착된 것인데, 야권 일각에선 그의 마약 적발 사실을 두고도 음모론을 편다. 논란 중인 국정 현안에서 시민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연예인의 비위 기사를 푸는 소위 ‘물타기’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관세청의 마약류 밀수 적발 건수가 작년에만 1054건에 달한다는 점, 연간 적발되는 마약사범 숫자도 지난 3년간 매년 1만 명을 계속 넘었다는 걸 고려하면, 이는 국내에서 점점 심각해지는 마약 범죄가 표면화한 사건에 더 가깝다. 범죄통계에 잡히지 않는 마약 투약자가 더 많다는 게 다른 자료로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하수 역학(sewage epidemiology)이라는 기법이 마약 등의 불법 약물 탐지에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람이 약물을 삼키거나 주사하면, 약물은 체내의 자연스러운 대사 과정을 거쳐 소변과 대변의 형태로 배출되게 된다. 마약 중독자라도 배변은 꾸준히 해야 하니, 이들이 화장실에서 만들어낸 배설물에는 마약 잔여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이런 폐수가 모인 하수처리장에서의 마약 잔여물 농도를 구해서 역산(逆算)하면, 실제 마약 투약자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수구로 버리기에 급급했던 생활폐수에 숨은 귀중한 정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국내에서는 2020년부터 식약처가 이 기법을 국내에 도입하는 시범사업을 진행해 현재까지 2년 치의 자료가 나왔다. 그런데 이 결과가 꽤 충격적이다. 1년 새 수치가 모두 늘어난 것에 더해, 하수도에서 검출된 마약량을 역산해보면 2021년 기준 인구 1000명당 하루에 투약하는 필로폰 사용량이 22.9㎎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인 필로폰 투여량이 1회에 30㎎ 정도니, 인구 1000명 중 한 명꼴로 매일 필로폰을 1회씩 투약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2022년 기준 성인 인구가 4300만 명이니, 이를 토대로 추산하면 마약 투약자 규모는 4만여 명에 육박한다. 매년 검거되는 마약사범 수가 1만 명이니, 3만 명 가까이 되는 숫자가 숨어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빅데이터’라고 하면, 첨단 IT 기술로 데이터를 멋지게 분석하는 것만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실제론 하수구 생활폐수야말로 유용한 빅데이터의 전형적인 예다. 기존에는 데이터 마이닝(mining)을 통해 정보를 추출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자료원을 새로이 발굴하고, 여기서 유의미한 정보를 뽑아냈다. 현란한 첨단 데이터 분석 기술 없이도 이미 충분히 훌륭한 빅데이터 활용이다. 이렇듯 데이터 마이닝도 빅데이터 산업의 중요한 축이지만, 정치권에서조차 반쪽짜리 ‘분석’으로만 빅데이터를 이해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박한슬 약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