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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거야 독주’에 실종된 정치…박진 장관 해임건의안 강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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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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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석 더불어민주당이 힘을 앞세워 박진(사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단독 처리했다. 정파적 이익을 앞세운 거야(巨野)의 독주에 여당은 무기력했다. 여야 대치가 더욱 격화되면서 ‘정치의 실종’을 가속화시킨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반발해 본회의장에서 퇴장한 가운데 국회는 29일 오후 7시쯤 박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재적의원 299명 중 민주당 의원 166명과 기본소득당 용혜인, 무소속 김홍걸·민형배·양정숙 의원 등 170명이 무기명 투표에 참여했다. 이 중 찬성 168명, 반대 1명, 기권 1명으로 찬성이 과반(150석)을 넘겼다. 국무위원 해임건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헌정 사상 일곱 번째로, 현행 87년 헌법 체제에선 이전까지 세 차례가 전부다.

사실상 민주당의 단독 가결이었다. 정의당(6석)과 시대전환(1석)은 “외교 참사의 직접 책임은 대통령실”이란 등의 이유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과하고, 민주당은 해임 건의를 철회하는 것으로 타협할 것을 제안한다. ‘강대강’ 이렇게 치달으면 안 된다”(이상민 의원)는 당내 비주류의 목소리도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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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의원들은 이날 오후 본회의 속개에 앞서 국회 로텐더홀에서 “해임건의안 즉각 철회하라” “민심외면 정쟁유도 민주당은 각성하라”는 피켓을 들고 규탄시위를 열었으나, 거대 야당의 벽을 실감해야 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회의석마다 “대통령은 사과하라” “외교라인 전면쇄신”이란 피켓을 걸어놓은 가운데 김진표 국회의장은 오후 6시6분쯤 회의를 다시 열었다. 무기명 투표를 거쳐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기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표결에 앞서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는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박진 장관이 무엇을 잘못했나”라고 항변했다. 반면에 진성준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해임안 제안설명에서 “국격 손상과 국익 훼손이라는 전대미문의 외교참사를 일으킨 데 대해 주무장관으로서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진 원내수석은 이 과정에서 “국회에서 이 ××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MBC 방송 자막을 그대로 읽기도 했다.

정의당 “정치 올스톱시키는 나쁜 촌극 될 것” 표결 불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 둘째)가 29일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상정 반대 피켓 시위를 하는 국민의힘 의원들을 지나 본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박 장관 해임건의안은 이날 오후 본회의에서 재석 의원 170명 중 찬성 168명, 반대 1명, 기권 1명으로 가결됐다.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 둘째)가 29일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상정 반대 피켓 시위를 하는 국민의힘 의원들을 지나 본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박 장관 해임건의안은 이날 오후 본회의에서 재석 의원 170명 중 찬성 168명, 반대 1명, 기권 1명으로 가결됐다. 뉴스1

윤 대통령이 이날 오전 청사 출근길 도어스테핑에서 “박 장관은 탁월한 능력을 갖춘 분”이라며 해임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한 만큼 정국은 더욱 차갑게 얼어붙을 전망이다. 박 장관도 해임안 통과 직후 입장문을 통해 “흔들림 없이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하겠다. 외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쟁의 희생물이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양당 지도부 역시 해임안 통과 직후 거친 장외 설전을 주고받았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69석이 있다고 함부로 의회권력을 휘두르다 국민들로부터 심판받고도 제대로 정신을 못차린 것 같다. 실질적으로 대선 불복 행위”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은 30일 김진표 국회의장 사퇴권고안을 제출하기로 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이번 순방외교에 대해 ‘실패했다’ ‘부족했다’고 지적하는데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했다. 민주당은 30일 당 ‘윤석열 정권 외교참사·거짓말 대책위원회’ 발족식을 연다.

해임안 통과는 과거에도 정치적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2001년 9월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파문으로 촉발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해임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김대중 정부 내내 지속되던 DJP 공조가 깨졌다. 2년 뒤 한총련의 미군 장갑차 점거시위로 시작된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의 해임안 가결(2003년 9월)은 이듬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와 촛불시위로 이어진 여야의 강경 대치를 불렀다.

이에 정의당은 “결국 국회뿐 아니라 정치 그 자체를 ‘올스톱’시키는 나쁜 촌극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며 일찍이 “표결 불참”을 선언했다. 정의당은 특히 윤 대통령 ‘비속어 논란’의 책임을 박 장관에게 묻는 게 초점이 어긋났다는 점을 지적했다. 장혜영 정의당 원내수석부대표는 “과거 영국 왕궁에는 왕자가 어떠한 잘못을 저질러도 왕자 대신 매를 맞는 아이가 따로 있었다. 절대로 왕자를 벌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대통령은 ‘휘핑보이(whipping boy, 왕자 대신 매 맞는 아이)’ 뒤에 숨지 말고 국민과 국회에 사과하라”고 강조했다.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박성민 대표는 해임안 통과에 대해 “별로 의미도 없는 정치쇼. 쓸데없는 힘자랑”이라고 혹평했다. 박 대표는 “대통령실과 여당의 강경대응만큼이나 엉뚱한 결론이 해임안 통과”라며 “국민들에게 ‘야당이 진영싸움으로 몰고간다’는 인상을 줘 오히려 국면을 전환시킬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일관된 강경대응이 이날 파국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날 국민의힘과 대통령실 수뇌부는 “가짜뉴스만은 좀 퇴치해야 한다”(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 언론사가 국기문란 보도를 자행하고 있다”(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며 시종일관 강경 발언을 이어갔다.

국민의힘 ‘MBC 편파·조작방송 진상규명 TF’(위원장 박대출 의원) 역시 오후 대검찰청을 방문해 박성제 MBC 사장과 보도국장·디지털뉴스국장·취재기자 등 4명을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비속어 논란’ 최초 보도 과정에 위법 사항이 있었는지를 검찰 수사로 밝혀야 한다는 취지다. TF 측은 MBC가 ▶윤 대통령 발언을 엠바고(보도유예) 전에 유포했고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발언에 ‘미국 의회’ 등 사실과 다른 자막을 입혀 보도했다고 고발장을 통해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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