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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미군 기지촌’ 국가 책임 인정…“피해 여성에 배상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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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50년대부터 국가가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미군 주둔지 주변에 기지촌을 운영하고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조장한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미군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한 원심을 29일 확정했다. 지난 2014년 소를 처음 제기할 당시에는 122명의 여성이 참여했지만, 8년여 걸린 소송 끝에 상고심엔 95명만이 원고로 남은 상태다. 지난 1957년 정부는 미군 주둔지 인근에 미군 위안 시설을 지정하고, 80년대까지 강제 성병 검진과 치료 등의 규정을 마련하며 관리했다. 성병 검진에서 탈락하면 소위 ‘몽키하우스’라 불리는 낙검자 수용소에 갇혀 지내게 했다. 성병에 걸린 미군이 상대 여성을 지목하는 ‘컨택’ 방식 등에 따라 성병 진단이 없이도 격리될 수 있었다. 격리된 여성들에게는 무차별하게 페니실린 주사를 놔 일부는 쇼크로 사망하는 일도 일어났다.

당시 정부는 “위안부는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며 위안부들을 상대로 주기적으로 영어 회화 교육 등을 실시하면서, “다리를 꼬고 무릎을 세워 앉으라”며 구체적인 태도도 가르쳤다.

원고들은 ▶국가가 기지촌을 체계적으로 관리·운영한 점 ▶‘애국 교육’을 실시하며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조장한 점 ▶성병 격리 치료 등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관리한 점 ▶미군과 포주들의 착취 등 불법행위를 방치한 점 등을 문제 삼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지난 2017년 1심 재판부는 격리 수용 치료 과정에서의 책임만을 인정한 반면, 2018년 2심 재판부는 국가 책임 범위를 더 넓게 봤다. 국가가 외국군 상대 성매매를 조장하거나 정당화해 외국군의 사기를 향상하고,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운영과 관리에도 나섰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윤락행위 금지 규정에 따라 성매매를 금지하고 있었는데도, 예외적으로 기지촌 성매매는 적극적으로 조장한 점 역시 고려했다.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 “원고들의 성적 자기결정권, 나아가 성으로 표상되는 원고들의 인격 자체를 국가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고 지적했다. “기지촌에 성매매 관련 종사자들이 모여든 것을 기화로 위안부의 성을 상품화해 외화 획득을 도모한다는 것은 명백히 위법하다”며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인권존중의무를 위배한 것”이라고도 했다.

다만 당시 경찰들이 성매매알선업자들과 유착관계에 있었다거나, 고의로 여성들의 범죄 피해를 방치했다는 부분은 인정하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선고 당시 원고 117명에 대해 국가가 6억4700만원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역시 “여성들이 국가의 위법행위로 인해 인격권 내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함으로써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며 2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국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2심 판단도 맞다고 봤다. 앞서 정부는 “불법행위일로부터 5년 안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하므로 이미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사안을 과거사정리법에 따른 ‘국가의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보고, 대법원 판례에 따라 장기 소멸시효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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