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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美 국채 금리에 등 터지는 韓 기업…'채권 대학살' 위기 오나

중앙일보

입력

미국 긴축 여파로 회사채 금리가 뛰면서 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화하고 있다. 셔터스톡

미국 긴축 여파로 회사채 금리가 뛰면서 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화하고 있다. 셔터스톡

# 대우건설은 신용등급 A등급(안정적)에도 지난달 회사채가 아닌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으로 800억원을 조달했다. P-CBO는 신용도가 낮아(BBB등급 이하) 회사채 발행이 힘든 중소기업이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얻어 발행하는 증권이다. 금리 인상과 부동산 경기 침체 분위기에 대기업인 대우건설마저 정부기관 보증에 기댄 셈이다. 정부가 코로나19 위기 대응 차원에서 대기업에도 P-CBO 발행을 허용한 점을 이용한 것이다. 대우건설이 P-CBO로 자금을 조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과 SK주유소 116곳을 자산으로 보유한 SK리츠는 지난 27일 960억원 규모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50억원어치밖에 인수 주문을 받지 못했다. 만기가 1년으로 짧은 데다 금리를 최대 연 5.1%로 내걸었는데도 기관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한 자산운용사 채권 운용 담당자는 "앞으로 금리가 더 오르면 채권 가격이 내려갈 수 있어, 기관들은 좀 더 지켜보자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미국 금리 인상 후폭풍에 국내 기업의 자금난이 더욱 심화할 전망이다. 미국 국채 금리 급등으로 국내 회사채 금리마저 폭등할 조짐을 보이자 급기야 정부가 정책자금을 풀어 '금리 방어'에 나설 정도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할 경우 국내에서 '채권 대학살' 사태가 나타날 수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온다. 채권 대학살은 1994년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금리 인상으로 채권값이 폭락하면서 한 해 동안 투자자 손실 등으로 1조 달러(현재 환율로 약 1431조원)가 넘는 자금이 증발한 사건이다.

8월 일반 기업 회사채 발행액 60% 감소 

29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달 비금융 일반 기업 회사채 발행액은 1조3000억원으로 전월 대비 59.3%(1조9500억원) 감소했다.

신용도가 최상급이 아닌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은 더욱 힘들어졌다. 지난달 신용등급 AA급 미만 회사채 발행 비중은 12%로 전월(23.2%)의 절반 수준이다. 기업들은 회사를 운영하거나 신규 투자, 기존 부채 상환 등을 위해 회사채를 찍어 시장에서 돈을 빌린다. 그러나 금리 인상에 따른 채권값 하락과 경기 침체 우려에 투자자들이 돈을 빌려주길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이 커지는 모습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美 국채 금리 오르면 국내 회사채 금리도 올라  

29일 현재 AA-급 회사채 금리(3년물)는 5.378%다. 올해 초(1월3일 2.46%) 대비 두 배 넘게 올랐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국채 금리가 덩달아 뛴 여파다. 미국 국채 금리는 28일(현지시간) 영국발 금융시장 불안으로 장중 한때 4.019%까지 올랐다가 영국 중앙은행의 대규모 국채 매입 발표로 3.736%에 장을 마쳤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미국 국채 금리가 오르면 한국 국채 금리도 덩달아 오를 수밖에 없다. 신용도가 좋은 미국(Aaa급)이 이자를 더 주면, 자금이 미국 국채 시장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용도가 낮은 한국(Aa2급)은 더 많은 이자를 줘야만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원리로 국채보다 신용도가 낮은 회사채 금리는 더 가파르게 오를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고금리로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돈을 빌리거나 자금 조달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은 내려간다. 예를 들어 연 3%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기존 채권의 가격은 시장 금리 상승으로 연 5% 이자를 주는 새로운 채권이 나오면 투자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기관 투자자들은 금리 인상기에 채권 투자를 미루는 경향이 생긴다. 현재 3.25%인 미국 기준금리는 내년 4.6%까지 오를 전망이기 때문에 앞으로 금리가 더 오를 때까지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정부 개입에도…"추세 바꾸기엔 역부족" 

정부가 28일 5조원의 긴급 자금을 투입해 채권 금리 방어에 나선 것은 빠르게 오르는 국채·회사채 금리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다. 고열에 먹는 해열제처럼 단기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 있지만, 당분간 시장 금리가 오를 것으로 예측하는 상황에선 정책 효과도 미미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임재균 KB증권 연구원은 "전일(28일) 정부 개입으로 장중 0.1%포인트 이상 오르던 국고채 금리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며 "다만 채권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는 건 연준의 강한 긴축과 영국 금융시장 불안 등 외부 요인이 크기 때문에 중·장기적인 (채권 금리 인상) 추세를 바꾸기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은 "정부의 채권 시장 개입이 잦아지면 자칫 글로벌 자금 시장에 한국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며 "한국 기업의 부채 상환 능력에 대한 불신이 퍼지면 '채권 대학살' 위기로 이어질 수 있어 뾰족한 대응책을 내놓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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