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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성남 신부의 속풀이처방

빠른 답을 찾는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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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요즘 빠른 정답 찾기가 유행인 듯하다. 즉석에서 묻고 즉석에서 답을 듣는 상담이 한창이다. 입시 학원도 아니건만 족집게 답을 구하듯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럴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찔하다. 인생 문제에 대해 빠른 답을 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우선 TV 상담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느낀 것부터 말하고자 한다. 인생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상담하는 것은 내담자에게 좋지 않다. 상담은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처럼 해야 한다. 상담자는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하고, 영상을 찍는 것은 절대금물이다.

빠른 답, 뇌 퇴화 초래
비판적 의식 사라지면
자기문제, 점괘에 의존
‘한 방에 해결’은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인이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가정사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상담을 받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과시욕구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받은 상담은 영상으로 두고두고 남아서 사람들의 술 안줏감이 되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상담자야 자기과시의 기회이기에 마다할 일이 없겠지만, 내담자들은 후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독일 시인 릴케. 인내와 성숙의 가치를 읊었다. [사진 Deutsche Fotothek]

독일 시인 릴케. 인내와 성숙의 가치를 읊었다. [사진 Deutsche Fotothek]

또한 빠른 답을 구하는 것은 뇌가 퇴화하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다. 치매에 걸리지 않는 노인분들은 대부분 독서하고 사색하면서 천천히 답을 찾는 분들이다. 반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답을 다른 사람에게서 쉽게 구하려는 사람들은 마치 자판기에 매달린 어린아이 같다. 이들은 갈수록 미성숙해지고, 심지어 점괘에서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의존적인 성격이 되어 자기 문제의 답을 자기가 찾을 수 없기에 상담가나 점괘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비판능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치아는 음식을 씹는 기능을 한다. 음식을 잘게 씹어야 소화가 잘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도 치아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외부로부터 오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곱씹어 생각하는 기능을 치아 기능성이라고 하는데, 이 기능이 원활해야 지혜가 생기고 상황에 대해 사려 깊은 판단을 할 수 있다. 이 기능이 약해지거나 상실되면 인생길이 어려워진다. 귀가 얇아져서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넘어가고, 결국은 사기를 당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또한 개인의 의식이 약하다보니 집단적 소리에 쉽게 휘둘린다. 마치 강물에 던져진 지푸라기처럼 소리가 큰 사람이 주도하면 쉽게 걸려든다.

이런 사람들은 가짜뉴스에 현혹되기 쉽다. 이들은 영악한 독재자나 사이비 교주의 먹잇감이다. 독재자의 하수인이나 사이비 교주들, 엉터리 종교인들의 추종자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하는 것, 그들에게 착취를 당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생각하는 훈련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심복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라고 하였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악을 번성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란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담은 1회에 1시간씩 최소 10회 이상을 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가진 문제는 대부분 오랜 시간에 걸쳐 생긴 것이고, 타인과의 관계가 얽히고설켜 형성된 꼬인 실타래 같은 것이기에 한 방에 해결할 수 없다.

또한 대부분의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보다 외부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 외부에서 원인을 발견하면 고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탐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취약점을 노리고 한 방에 해결해주려는 상담가들은 조심해야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했다. “마음 안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인내하십시오. 질문 자체를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지금 답을 찾지 마십시오. 답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답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지금 당신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을 품고 살아가다 보면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이 그렇게 찾았던 답이 어느 날 당신 안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쉽지 않은 주문이지만 유념해야 할 조언이다.

함석헌 선생께서는 생각하는 국민이라야 산다고 하셨다. 생각하지 않는 국민들은 언젠가는 사기꾼들에게 농락당하고 나라를 빼앗길 것이기에 간곡한 심정으로 당부하신 것이다. 법사, 도사, 사이비 교주들이 판치는 작금에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다 망가진 나라를 물려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