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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민주당의 미끼를 대통령이 확 물어버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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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영화 '곡성'의 한 장면.

영화 '곡성'의 한 장면.

"미끼를 확 물어분 것이여. "
영화 '곡성'(2016)에서 황정민이 뱉었던 이 대사가 요즘 들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통화 가치 폭락에 자산시장 붕괴 등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곡소리가 들려오는 엄중한 시기에 마치 우린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벌써 열흘 가까이 세상 쓸모없는 '윤석열 대통령 비속어 논란'이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고 있는 탓이다. 애초에 벌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대통령의 뉴욕 발언은 어찌 보면 얼마든지 웃어넘길 수도 있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쩌다 미국 순방 중 방송 풀(공동 취재) 카메라에 잡힌 대통령의 비공개 워딩이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를 가리는 전 국민 청력 테스트로 번진 끝에 여야 간은 물론 우리 사회 전체를 극한 대립으로까지 몰고 왔을까.

MBC는 불명확한 윤석열 대통령 발언에 확인되지 않은 자막을 달아 내보냈다. MBC 캡처

MBC는 불명확한 윤석열 대통령 발언에 확인되지 않은 자막을 달아 내보냈다. MBC 캡처

지지하는 진영에 따라 책임 소재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이겠지만 난 아무래도 더불어민주당(혹은 MBC)이 던진 미끼를 대통령이 덥석 물어버린 게 이번 사태의 본질 같다. 스스로 일을 키웠다는 얘기다. 대통령실의 의구심대로 설령 '대통령 흔들기'라는 불순한 의도로 시작된 게 맞더라도 대통령실 대응 전략 역시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마이크 켜진 줄 모르고 평소의 점잖지 못한 언어 습관(XX)을 노출한 건 그 자체로 윤 대통령 잘못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다 김은혜 홍보 수석을 비롯해 대통령실 홍보 라인의 손발 안 맞고 부적절한 말 바꾸기로 사태를 제대로 수습할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도 심각한 무능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대통령이 사과했다면 그만이다. 야당이든 MBC든 대통령의 계면쩍은 사과에도 불구하고 계속 무리하게 국정의 발목을 잡고 미국까지 끌어들여 동맹 훼손을 시도했다면 오히려 민심의 역풍을 맞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 벌어진 상황은 정반대다. 야당의 치밀한 의도든 운 좋은 우연이든, 지금 대통령은 정확히 야당이 원한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막말 대통령의 무례한 언사가 불러온 국제적 망신, 이에 더해 사과조차 하지 않는 오만과 불통 이미지 말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전 원내대표(오른쪽에서 두번째)와 박대출 MBC 편파방송조작 진상규명위원장, 박성중 방통위 간사 등 국민의힘 의원들이 28일 문화방송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해외 순방 보도와 관련해 항의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권성동 국민의힘 전 원내대표(오른쪽에서 두번째)와 박대출 MBC 편파방송조작 진상규명위원장, 박성중 방통위 간사 등 국민의힘 의원들이 28일 문화방송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해외 순방 보도와 관련해 항의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아닌가.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매체조차 관련 뉴스를 내보낼 때마다 '윤 대통령 비속어 논란'이라는 구절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보도가 일주일 넘게 이어지면서 국민 머릿속엔 '대통령 비속어'라는 개념만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 이슈를 빨리 끊어내도 모자랄 판에 대통령실과 여당은 합심해 점점 더 판을 크게 벌이고 있다. 정작 국민은 넉넉한 마음으로 대통령 실수를 눈감아줄 준비가 돼 있는데 대통령은 이런 기대를 배반한 채 최소한의 유감 표명이나 그날 워딩에 대한 정확한 설명도 없이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하고 국민을 위험에 빠뜨린 데 대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며 강공 모드에 돌입했다.
국민은 어리둥절하지만 여당은 아랑곳없이 이를 신호탄으로 그야말로 총공세에 나섰다. 대통령실 부대변인, 전·현 원내대표, 여기에 새로 만든 MBC 편파·조작 방송 진상규명 TF 위원장이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왜곡 보도(자막 조작) 등 정언유착 프레임으로 전환하려는 모양새다. 문제는 그럴수록 오히려 그 유명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늪에 빠진다는 점이다. 상대 주장을 무력화하려면 상대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게 프레임의 기본 원칙이다. 그런데 여당 의원들이 한목소리로 방송 조작이나 왜곡 편파 보도, 매국 허위방송, 외교적 자해공갈 얘기를 꺼낼 때마다 결국 '윤 대통령 비속어 논란'이라는 프레임만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역효과만 내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민주당과 MBC가 만든 미끼에 국민과 미국이 낚였다고 했지만, 정작 낚인 건 국민의힘인 지도 모른다. 페이스북 캡처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민주당과 MBC가 만든 미끼에 국민과 미국이 낚였다고 했지만, 정작 낚인 건 국민의힘인 지도 모른다. 페이스북 캡처

그런 면에서 권성동 국민의힘 전 원내대표가 지난 26일 낸 "대국민 보이스피싱, MBC가 미끼를 만들고 민주당이 낚시를 했다"는 논평에 절반만 동의한다. MBC와 민주당이 미끼를 만들어 낚시를 했다는 건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낚인 줄도 모르고 제대로 낚인 건 권 의원 주장대로 우리 국민이나 미국이 아니라 대통령과 국민의힘 본인들 같아 하는 말이다.
최초 발언 이후의 지리한 공방을 다 거둬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결국 윤 대통령의 부적절하거나, 최소한 품격 없는 언행만 남는다. 그런데 여기엔 눈을 감아버리니 그 이후에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국민을 설득하기 쉽지 않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MBC가 해온 편향적 보도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바닥으로 추락한 메인 뉴스 시청률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앞뒤 안 가리고 무리하게 들쑤시기만 하면 여당의 핵심 지지층이야 시원하다고 박수치겠지만 이를 지켜보는 보통 국민은 MBC보다 먼저 이 정권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 속 황정민 대사처럼 "꼭 불에 대봐야 뜨거운 줄 아는" 아마추어 여당이 안타깝다.

민주당 프레임 말려든 대통령 #뉴욕 발언 종결 대신 확전 모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늪 빠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