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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의 기부, 정부의 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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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박수련 기자 중앙일보 산업부장
박수련 팩플팀 팀장

박수련 팩플팀 팀장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 창업자의 기부가 화제였다. 창업자 이본 쉬나드(83)가 부인과 자녀들이 보유한 약 30억 달러(28일 환율로 약 4조3200억원) 규모의 회사 지분을 기후위기 관련 비영리재단(98%)과 신탁 회사(2%)에 기부한다고 밝혔다. 영업이익 약 1억 달러도 매년 기부하겠다고 한다. 환경 보호와 직원 복지를 이윤 추구보다 우선해 온 브랜드 스토리의 완성에 찬사가 쏟아졌다.

이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이면도 있다. 세금 전문가들은 쉬나드 가족이 이번 기부로 약 7억 달러(약1조원)의 절세 효과를 봤다고 본다. 비영리재단에 기부한 주식에는 미국 연방정부에 낼 증여·상속세가 면제되는 법을 활용했다는 것. 절세 방법만 놓고 보면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공화당 지지 단체에 회사를 넘겨 역대 최대 규모의 정치 기부금(16억 달러) 기록을 세운 기업인(트립 라이트 대표)과 차이가 없다. 게다가 쉬나드는 신탁한 의결권 주식으로 파타고니아 경영도 계속 감독한다. 한국인이 보기엔 부를 대물림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신선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파타고니아 창업자 이본 쉬나드는 기부 계획을 밝히며 “파타고니아의 주주는 지구뿐”이라는 메시지를 공개했다. [파타고니아 홈페이지]

파타고니아 창업자 이본 쉬나드는 기부 계획을 밝히며 “파타고니아의 주주는 지구뿐”이라는 메시지를 공개했다. [파타고니아 홈페이지]

결과적으로 눈 뜨고 코 베인 건 미국 정부다. 과세 기회를 놓쳤고, 다른 억만장자들의 이런 시도를 막을 명분도 없어 보인다. 정부의 실패다. 쉬나드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지금의 자본주의는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자로 이뤄져 있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기부 결정이) 선한 영향력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가 세금 걷어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가설에 대한 회의가 엿보인다. 미국 정부는 글로벌 기후협약을 깨고 나온 전력도 있다. 공공의 무능이 지속된다면 세금 회피 명분은 쌓인다.

국내에서도 정부란 조직에 대한 기대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외교 참사 논란에 ‘누가 국익을 훼손했는지’ 따져보자는 대통령과 정부·여당에서 무능이 읽힌다. 지난 정부에서 공무원은 대폭 늘었는데, 저출산 고령화의 터널도 부의 양극화도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인다. 이 고차 방정식을 현 정부는 풀 수 있는가. 국회는? 현재의 택시 부족은 시장 경쟁을 틀어 막은 ‘타다금지법’의 결과다.

“공공보다 기업이 사회문제 해결 방법을 더 잘 찾을지도 모른다.” 국내 벤처 1세대 창업자 5명이 8년 전 자선벤처펀드를 만들며 강조했던 얘기였다. 그 중 한 명인 고 김정주 넥슨 창업자가 지난 2월 갑자기 사망하면서 유족은 6조원대의 상속세 납부 계획을 냈다고 한다.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의 상속세(12조원) 다음으로 큰 규모다. 정부가 잘 쓰기 바란다. 요즘 창업자들은 기업을 물려줄 의지도 약하고, 물려줄 자식이 없는 경우도 많다. 훗날 한국에서도 파타고니아나 트립 라이트의 길을 찾고 싶은 창업자가 봇물을 이룰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