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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개혁 최악의 시나리오…어설프게 손대면 尹정부 무너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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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배경은 민주노총 집회 장면. 그래픽=박경민 기자

윤석열 대통령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배경은 민주노총 집회 장면. 그래픽=박경민 기자

노동시장의 유연화,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통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산업현장에서의 불법 행위 근절.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내건 노동개혁 과제다. 앞서 5월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세계적 대변혁 과정에서 경쟁력을 제고하고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노동개혁이 필요하다"면서 초당적 국회 협력을 요청했다. 선언에 머문 게 아니다. 지난 6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안을 직접 브리핑하면서 연장근로 등 노동시간 유연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서 당연한 의문이 든다. 이 시국에 노동개혁? 비록 정권 초기라고는 하지만 지지율로 보자면 역대 최약체인 정부가 외환위기 급의 경제적 불안 속에서 노동개혁에 나선다고? 게다가 노조와 소통이 어려운 보수 정권 아닌가.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과 관련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런 거다. 국회를 장악한 더불어민주당은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다. 민주노총은 이 정부 출범 때부터 일찌감치 투쟁 결심을 굳혔다. 정부와 노동계가 충돌해 불꽃이 일면 야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름을 끼얹을 거다. 작은 충격에도 패닉을 반복하는 금융시장은 더 요동치며 환율과 물가가 치솟는다. 자, 윤 대통령은 이 상황에서도 과연 노동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까? 범(凡) 민주당 지지 세력이 윤 대통령을 내버려 둘까?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 19일 '민주노총 결의대회 선포 및 집회 보장 촉구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주노총은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을 '노동개악'이라고 부른다. 뉴스1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 19일 '민주노총 결의대회 선포 및 집회 보장 촉구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주노총은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을 '노동개악'이라고 부른다. 뉴스1

미국과 영국 상황이 시사적이다. 지난주 미국에서는 철도 파업이 주요 일간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물가 상승을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바이든 대통령까지 중재에 나섰다. 개별 사업장 파업에 대통령이 나서는 건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좋은 방법도 아니지만 인플레이션 위기가 다급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새 정부 출범 한 달도 안 된 영국에서도 철도노조가 집권당 전당대회 날인 10월 1일 파업에 돌입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추모 분위기로 잠시 중단한 파업을 재개하는 것이다. 지금 영국 상황을 보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까지 받았던 1970년대 후반과 비슷하다. 감세를 단행하고 노동법 개혁을 약속한 신임 리즈 트러스 총리는 이후 파운드화 폭락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코너에 몰렸다. 윤 대통령이 노동개혁을 단행하려면 아마 미국이나 영국보다 힘든 길을 갈 거다. 아니, 윤 대통령 처지는 저들보다 훨씬 나쁘다.

의회에서 발언하는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 영국은 집권 보수당의 감세 정책에 따른 파운드화 가치 폭락으로 경제 위기를 맞았다. EPA=연합뉴스

의회에서 발언하는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 영국은 집권 보수당의 감세 정책에 따른 파운드화 가치 폭락으로 경제 위기를 맞았다. EPA=연합뉴스

어려우니 접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노동개혁은 절박하다. 우리 사회의 갈등은 양극화한 노동시장에서 기인하는 게 크고, 최근 두드러진 한국경제의 생산성 둔화 역시 비효율적인 노동시장이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게다가 저출산에 따른 전대미문의 인구 고령화 속도를 고려할 때 노동시장 개혁은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다. 되면 하고, 아니면 그만둬도 좋을 개혁이 아니다. 좌파든 우파든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배경이다.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한국사회에서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갈리는 영역이라 곧바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윤 대통령이 말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살펴보자. 이 원칙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해석은 각양각색이다. 노동계의 전통적 생각은 동일노동은 곧 동일사업장이다. 같은 일터에서 일하면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비정규직은 정규직화해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이나 공공부문에 취업한 청년들 생각은 다르다. 동일노동이란 동일시험이다. 그래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불공정하다. 기업 생각은 또 다르다. 동일노동이란 경쟁 시장에서 같은 가격으로 평가받는 노동이다. 미국처럼 고용과 해고가 수요·공급에 따라 자유롭게 이뤄지는 게 최선이다. 약간 과장을 섞자면 입장 차이가 이렇게 크다. 똑같은 단어를 놓고 전혀 다르게 바라본다. 비정규직 철폐, 비정규직 정규직화 철폐, 정규직 철폐. 정말 상극이다.

동일임금도 컨센서스가 없긴 마찬가지다. 노동계는 동일임금을 동일근속임금(호봉제)으로 해석한다. 1980년대 말 생산직 노동자의 요구는 사무직처럼 호봉제를 적용해달라는 거였고, 오늘날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의미 역시 정규직 호봉 테이블의 쟁취다. 그런데 기업의 동일임금은 동일생산성 임금이다. 되려 호봉제는 개혁 대상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호봉제는 전체 기업의 14%만 적용하고 있다. 호봉제를 쟁취하겠다는 사람이나 없애자는 사람이나 실은 소수다. 관심 없는 사람이 더 많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란 단 여덟 자를 두고도 이렇게 이해관계가 부딪힌다. 이러니 노동개혁의 실질적 과제를 고려하면 합의는 더 까마득해 보인다. 임금 격차의 원인인 대기업·중소기업 생산성 격차, 정년 연장과 청년 고용 사이의 상충관계, 여성의 출산·육아 불이익 등등, 하나하나가 전부 엄청난 잠재적 갈등 요소다. 잘못 손을 댔다간 본전도 못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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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문재인 정부는 영리하게도(?) 개혁은 미루고 구호만 외쳤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진심을 다했다며 요란을 떨었지만, 실제론 비정규직 비중이 2016년 32.8%에서 2021년 38.4%로 늘었다. 임금체계 개혁은 아예 말만 꺼낸 후 방치했고, 저임금 계층을 위한다며 (후에 고용 역풍이 불어닥친) 최저임금만 대폭 인상했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는 지금 어떤 노동개혁을 해야 할까. 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2024년 총선 때까지 뒤로 미루는 거다. 또 다른 하나는 개혁 추진을 위한 동맹 구축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개혁의 성패는 사실 정책의 논리적 정합성보다 동맹의 구축 여부에 달려있다. 윤 정부는 이 점에 너무나 무관심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신제도주의 경제학(특정 사회의 정치 제도나 사회 규범에 따라 경제적 생산 활동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조)의 석학 더글라스 노스는 모든 질서는 지대를 공유하는(rent sharing) 엘리트 동맹에 기초한다고 이야기한다. 제도를 변화시키려면 그 동맹을 약화할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후진국의 군부 쿠데타가 그런 극단적 방법의 하나다. 선진국에서는 이와 달리 개혁 동맹이 기존 엘리트들에게 변화의 유인(incentive)을 제공하며 평화롭게 변화를 끌어낸다.

한국 노동시장에 대입해보자면, 지대 동맹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상층 집단들 사이에 있다. 개혁 동맹은 하층 집단에 절실하다. 윤 정부는 이들과 어떻게 동맹을 맺을지 고민해야 한다. 극우 성향 인사나 쌍팔년도 운동권을 앞세우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신 노동시장 지대 동맹을 맺고 있는 엘리트들에게 어떤 유인을 제공할 수 있을지 면밀하게 따져야 한다. 지난 문재인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편 가르고 비난만 해서는 얻을 게 하나도 없다. 규합과 타협, 우리가 보통 정치라고 부르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윤 대통령은 '임금체계와 노동시간 유연화' 같은 당위만 내세울 게 아니라 노동개혁을 위한 정치를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노동개혁은 효과가 한참 후에 나오기 때문에 효능감은 적고 이해당사자 간 갈등 폭발로 피로감은 크다. 대통령의 살 자리가 아니라 죽을 자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 각오가 필요하다. 그걸 지금 기대하는 게 비록 무리이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