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대한민국: 성찰과 대안

황승식 서울대 보건학과 부교수
테워드로스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며칠 전 코로나19 관련 사망자가 2020년 3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해 팬데믹의 끝이 보인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은 코로나19 팬데믹 위기를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맞았음에도 신종바이러스 진단검사키트의 개발·보급, 검사·확진-역학·추적-격리치료로 이어지는 3T 모델로 집단감염을 억제했다.이렇게 시간을 벌면서 인력과 병상 등 의료자원을 확보하고 백신 접종률을 높여, 오미크론 변이 대유행에도 치명률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다.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집합 금지 조치를 엄격하게 적용해 지나치게 자유를 제약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단기적 성과를 과신해 백신 도입이 지체되는 아찔한 상황을 겪었으며, 유행이 확산되기 전에 정확도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신속항원검사를 도입해 방역 정책에 혼란을 자초했다. 자영업자에 대한 재난지원금 지급의 규모와 범위를 두고 옥신각신하다 실기해 기대한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반발만 커졌던 상황도 돌이켜보면 뼈아픈 순간이었다.
코로나, 계절형 독감으로 진화
일일 확진자수 발표 중단하고
감염병 위기단계도 하향 조정
사회적 위로주간 선포 검토를
팬데믹(pandemic)은 감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현상으로 정의된다. 반면 신데믹(syndemic)은 사람의 건강이 동물과 생태계의 건강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인식 하에 지역·국가·세계적 차원의 다분야에서 협동하는 접근방식을 의미한다. 신데믹이라는 용어는 1992년 의료인류학자 메릴 싱어가 처음 사용하였고, 2020년 9월 영국의 의학전문지 ‘랜싯’에 리처드 호튼이 쓴 “코로나19는 팬데믹이 아니다”는 칼럼에서 재소환하여 널리 알려지게 됐다. 신데믹은 생물학적 접근 외에 사회적 접근이 필요하고, 질병 예후나 경과가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변화하므로 약물적 접근 외에 교육·고용·식품·환경 문제를 포함한 통합적 접근의 필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지난 7월 ‘코로나19 재유행 대응방안’ 발표에서 정기석 국가감염병위기대응자문위원장은 “과학은 그야말로 아주 광범위한 범위이고,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도 과학이다”라고 말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 발언은 팬데믹을 넘어 신데믹으로 전환이 필요한 시기에 보건의료 분야를 넘어 사회과학 분야의 학술적 성과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 코로나의 교훈으로 현대과학으로도 신종감염병 위기에 맞춤형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는 시간이 필요하므로 유행 초기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비약물적 개입이 유행 억제에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부수적 효과를 측정하여 실행 가능한 범위를 결정하기 위해 경제학·심리학과 같은 사회과학 분야의 접근이 필수적임을 알게 된 것 또한 중요한 교훈이다.

공동 기획
코로나19는 꾸준히 변이를 거듭하며 서서히 계절형 독감으로 진화하고 있다. 바이러스는 바이러스만의 시간표를 갖고 있으므로 방역 일선의 공무원이 철지난 민방위복을 탈의하거나, 실내에서도 더 이상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날을 정하여 팬데믹의 종료를 선언하는 일은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팬데믹에서 신데믹으로의 전환을 위해 먼저 ▶일일 확진자수 발표를 중단하고 ▶감염병 위기단계를 하향 조정하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중앙사고수습본부도 해체하자. 매일 신규 확진자 수가 뉴스에 도배되고 재난과 사고에 대처하는 정부 조직이 유지되면서 일상으로 회복은 불가능하다. 이제 방역 당국이 필요한 숫자를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조치를 취해도 될 시기가 됐다.
코로나19 사회적 위로 주간을 선포하자. 팬데믹이 지속된 지난 2년반 동안 코로나19에 감염돼 세상을 떠난 희생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희생자, 코로나에 감염됐다는 사실만으로 낙인이 찍혀 정신적 고통을 받은 감염자, 코로나에 감염되어 회복했지만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감염자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사회적 위로 주간을 지정해 희생자를 추모하고 감염자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자. 또한 극심한 번아웃에 시달리고 있는 방역 당국 공무원과 보건의료 종사자를 격려하는 시간을 갖자. 이런 치유의 경험을 공유해야 비로소 팬데믹은 신데믹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방역과 인권의 딜레마 ‘함께 살기’에 익숙해져야

장문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전염병은 집단 공포를 유발한다. 특히 질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회에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전염병을 신의 분노나 별자리의 이상한 배치의 탓으로 여겨 기도와 고행·점성술 등에 의지하려고 했다. 심지어는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희생양을 찾기도 했다. 1349년 흑사병이 한창이던 스트라스부르에서는 2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어 병을 퍼뜨렸다는 혐의로 끌려나와 개종할 것인지 처형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한 역사학자는 이를 ‘최초의 홀로코스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식과 관용이 결여된 사회에서 전염병이 끔찍한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
14세기 후반 들어 베네치아에서 본격적인 방역이 시작되었다. 항구에 들어오는 선박들이 격리되고 나중엔 격리병원도 세워졌다. 점차 ‘좋은 행정’과 ‘건강한 시민’의 개념이 결합되어 국가 주도의 합리적 방역이 발전했다. 그럼에도 전염병은 외국인과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증폭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주민의 사소한 일상까지 침투하여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아직 인권과 민주주의 관념이 나타나기 전이지만, 방역 주체와 대상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곤 했다.
뜨거운 ‘사회적 거리두기’ 논쟁
‘공동체냐, 생명이냐’식 도움 안돼
통제와 시민 자유 균형 맞추고
새로운 일상의 뉴 노멀 만들자
콜레라 시대의 나폴리는 그런 긴장을 잘 보여주는 무대이다. 1884년의 경우 방역팀의 고압적 자세와 일부 조치들이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특히 공기 정화책으로 사용된 역한 유황불이 하수구의 쥐떼를 거리로 내몰아 시민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시민들이 공공연히 저항하자, 당국은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집회와 시위를 금지했다. 1910~11년의 경우에는 봉쇄 조치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상인들이 노동운동과 연대하여 “나폴리가 죽어가고 있다”고 외치며 봉쇄 조치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번엔 시 당국과 중앙정부도 그런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감수성이 높은 21세기에도 역사는 반복되는 듯하다. 그렇기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개인의 삶과 자유를 침해하거나, 민족적·계층적·종교적 소수집단에 책임을 돌리거나, 백신 미접종자를 차별하는 일은 없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거리두기에 피로감을 느끼는 듯하다. 방역을 위해 경제를 희생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높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마스크 쓰기와 거리두기에 반대하는 시위가 익숙한 정경이 됐다. 일부 논객들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의 이름으로 국가 통제에 결연히 반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논자들은 일상을 위해 방역을 포기하는 것은 특히 노약자와 취약계층을 위험에 빠뜨리는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한다.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은 당장의 어떤 입장이기보다는 토론 자체이며, 따가운 시선과 은근한 압박 없이 토론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건강하지 않은 사회는 실수하는 사회가 아니라 어떤 실수를 범했는지 돌아보지 않는 사회다.
방역은 국가의 통제와 시민의 자유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맞춰나가야 할 현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쟁점이다. 스웨덴의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말름이 지적하듯이, 가장 좋은 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권리를 보호할뿐더러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며 생명을 유지하는 적절한 통제 조치를 동시에 실행해나가는 일이다. 확실히 이는 어려운 일이며, 인권과 방역은 종종 ‘딜레마’에 처한다. 여기서 공동체냐, 생명이냐의 양자택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칼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방식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맡기고, 우리는 말름의 말처럼 ‘딜레마와 함께 살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앞으로도 코로나 팬데믹과 싸우고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단지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코로나는 그저 자연의 재앙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 인류가 살아온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종래와 같은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더 큰 재앙을 맞이할 수도 있다. 따라서 몇몇 역사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조언하듯이, 팬데믹의 기억을 억압하거나 망각하지 않으면서 예전의 일상이 아니라 새로운 일상, 즉 ‘뉴노멀’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때다.
황승식 서울대 보건학과 부교수, 장문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