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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옮긴지 5개월, 화마 휩싸인 아들…아버지는 속이 타버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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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전날 화재로 검게 그을린 대전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지하주차장 입구.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으로 구성된 합동감식반은 27일 1차 감식을 진행했다. [연합뉴스]

전날 화재로 검게 그을린 대전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지하주차장 입구.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으로 구성된 합동감식반은 27일 1차 감식을 진행했다. [연합뉴스]

“오래 일할 생각은 아니라고 했는데…”

대전 유성구 현대아울렛 물류센터에서 근무하다 숨진 채 발견된 A씨(33) 작은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다. “착한 애였어요. 놀지 않고 뭐라도 하려고 (일하러) 다닌 거였는데… 전날에만 그만뒀어도 살았을 거예요. 원통한 생각이 들어요.”

빈소가 차려진 26일부터 거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A씨 아버지는 27일 이른 아침부터 빈소에 앉아 연신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A씨 빈소 앞에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보낸 화환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할 말이 생각이 나질 않네요.”

현대아울렛 방재실에서 시설팀으로 근무하며 소방시설을 관리하던 B씨(33)의 동생은 침묵 끝에 이렇게 말했다. B씨 빈소가 마련된 충남대병원 장례식장은 고요했다. B씨의 아버지는 빈소 한쪽에서 지인과 마주 앉아 소주를 연신 들이켰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비가 죄인이지… 아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는 B씨는 야간근무를 한 뒤 오전 9시 퇴근을 앞두고 있다가 화마(火魔)에 휩쓸렸다. B씨의 가족 등에 따르면 고인은 군 전역 후 통신기기 판매 관련 일을 하다 지난해 전기관련 자격증을 취득, 최근 대전 현대아울렛 시설관리를 맡은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새 회사로 옮긴 지는 5개월째라고 했다.

화재 사망자 시신은 대전선병원,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 보훈병원, 근로복지공단대전병원 등에 안치됐다. 몇몇 사망자 빈소는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국과수·소방·전기안전공사 합동 현장감식

대전 현대아울렛 화재참사 유가족이 27일 현장에 설치된 합동분향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전 현대아울렛 화재참사 유가족이 27일 현장에 설치된 합동분향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전경찰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소방, 한국전기안전공사 등은 27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화재현장 합동 감식을 진행했다. 1차 감식을 마친 뒤 대전경찰청 김항수 과학수사대장은 “불이 처음 목격된 (지하) 1층 하역장소를 중심으로 주변 일대를 광범위하게 집중적으로 감식했으나 화재 원인과 발화 지점 등은 아직 확인 못 했다”고 밝혔다.

1차 감식에서는 경찰이 확보한 폐쇄회로TV(CCTV) 영상에서 확인한 발화 지점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졌다. 화재가 발생한 지난 26일 오전 7시 45분쯤 하역장에는 1t 화물차가 도착한 뒤 한 남성이 물건을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 주변에서 연기와 불꽃이 발생했다. 감식 결과 화물차는 불에 타 뼈대만 남은 상태였다. 화물차는 내연기관(경유·휘발유 등) 차량으로 전기차는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오후 1시 30분부터 시작한 2차 감식에서는 하역장 인근 낙하물 등을 중심으로 감식이 이뤄졌다. 감식팀은 지게차를 이용, 뼈대만 남은 화물차를 들어놓은 상태며 주변에 떨어진 잔해물을 수거, 국과수에 분석을 의뢰했다. 분석에는 2주 정도가 걸릴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김항수 과학수사대장은 “CCTV에서 확인한 화물차 주변 연기·불꽃이 차량에 따른 것인지 다른 인화물질에 의한 것인지도 꼼꼼히 살폈다”고 설명했다. 일선 소방서의 한 화재조사관은 “작은 불씨가 종이상자나 비닐 속에서 서서히 타들어 가다 갑자기 확산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화재 현장으로 진입하는 합동현장감식 조사원들. [뉴스1]

같은 날 화재 현장으로 진입하는 합동현장감식 조사원들. [뉴스1]

이날 오후 2차 감식에는 이번 화재사고로 숨진 유족 3명도 동참했다. 이들은 숨진 가족이 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등을 직접 보기 위해 현장감식 동행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경찰은 현대아울렛 측으로부터 설계도 등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분석에 들어갔고, 조만간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할 방침이다. 대전고용노동청은 화재 사고와 관련,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여부 조사를 시작했다. 화재 사상자 8명 중 6명은 아울렛 협력업체 소속 직원들로 시설관리와 쓰레기 처리, 환경미화 등을 담당했다. 2명은 외부 물류택배업 업체 종사자로 물건 배송, 반품 관련 등 업무를 해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오후 2시 20분쯤 대전시 유성구 관평동 소재 현대 아울렛 사고 현장에 차려진 합동분향소에 도착해, 헌화한 뒤 8초가량 묵념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정지선 회장, 이틀 연속 유족에 사죄

윤 대통령은 소방당국 관계자로부터 보고받으면서 “어떻게 순식간에 불이 번질 수 있었는가”고 물었고, “화재 원인을 정확하게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유족들이 모여 있는 합동분향소 옆 천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너무 마음이 아프실 테고, 제가 말로 어떻게 위로를 드릴 수 있겠나”라며 “국가가 화재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빨리 정확히 알아내겠다”고 말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전날에 이어 이날도 현장을 찾아 유족들 앞에 선 뒤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며 “사고 수습과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합동분향소는 이날 낮 12시쯤 사고 현장 앞에 차려졌다. 이날 합동분향소 인근에 모인 유족들 모두 황망한 표정으로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 유족은 “왜 최신식 소방시스템이 무용지물이 돼 대형 화재로 이어져야 했는가”라며 따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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