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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홍규의 한반도평화워치

한·일 관계 걸림돌 ‘현금화의 덫’에서 벗어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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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 해법 찾기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법원은 2018년 식민 지배의 불법성에 근거하여 원고가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해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충돌하면서도 사법 자제의 원칙을 넘어서는 이 판결은 피해자의 분노를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주술(呪術)’이었다. 나아가 그 판결이 한·일 관계의 심대한 악화를 초래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저주(咀呪)’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판결이 나오자 원고인 피해자 측은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감격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으로 징용자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이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반발했고, 피고인 일본 기업은 판결 이행을 거부했다. 그러자 원고 측은 판결의 강제 집행을 위해 피고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현금화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후 한·일 관계는 ‘현금화의 덫’에 걸려 정치·외교·군사·안보·경제·문화 교류에 이르기까지 파국을 향해 돌진했다.

2022년 5월 새 정부 출범 이후 한·미 관계를 재설정한 윤석열 정부는 여세를 몰아 한·일 관계 개선에 정성을 쏟았다. 박근혜 정부 때 성사된 위안부 합의가 파행으로 끝난 쓰라린 경험을 교훈 삼아, 정부는 징용자 문제의 해법을 공개적으로 마련하기 위해 지난 7월 4일 민관협의회를 가동했다.

박정희·노무현 정부 때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보상한 적 있어
대법원이 일본기업 자산 현금화 확정 판결할 경우 대비해야
정부가 경매에 나온 피고 기업 자산을 사서 되돌려줄 수도
일본의 기금 참여도 기대…한·일은 과거에서 미래로 나가야

민관협의회 두 달 만에 막 내려

박홍규의 한반도평화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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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의회는 제3자가 피고 기업을 대신해 채무를 변제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는지를 주로 논의했다. 대위변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채권자인 원고 전원의 동의가 필요했고, 이 점에 대해 참석한 피해자 대리인은 일본 정부와 피고 기업의 사죄 표명 및 피고 기업의 기금 참여가 동의를 위한 최소 조건이 될 수 있음을 언급했다. 외교부는 이런 상황을 일본에 전하며 공개·비공개로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호응, 즉 사죄 표명과 기금 참여를 요청했다.

2차 협의회 이후에도 일본의 호응은 감감했고, 현금화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임박해왔다. 현금화의 덫이 조여오자 외교부는 7월 26일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고, 이를 대법원 판결의 이행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간주한 피해자 대리인은 협의회 불참을 선언했다. 8월 9일 피해자 쪽이 빠진 3차 협의회에서 채무 인수, 공탁 등이 검토되었고, 그 후로도 사죄와 기금 참여는 불가하고, 만약 현금화가 시행되면 보복 조치를 할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는 오로지 한국에 책임이 있다는 일본의 입장은 일관했다. 현금화의 덫에 걸린 일본도 성의 있는 호응은커녕 옴짝달싹 못 하고 원론적인 입장만을 되풀이했다.

9월 5일 마지막 4차 협의회가 열렸다. 외교부는 정부가 제3자가 되어 세금으로 변제하는 방식은 해법이 되기 어렵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것은 신설 재단이나 기존 조직이 제3자가 되어 한국의 청구권 자금 수혜 기업과 피고 기업으로부터 기금을 조성하여 변제하는 방식이 해법으로 남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재단을 신설하려면 여야 합의를 통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하기에 당장 작동할 수 있는 기존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주체가 되어 기금을 모아 변제하는 해법이 정부의 손에 남겨진 채, 가동한 지 두 달 만에 민관협의회는 막을 내렸다.

판결의 주술 풀려면  역사적 대응 살펴야

이런 결과는 일본 정부와 피해자 사이에서 긴장감 있는 곡예를 하던 정부가 결국 피해자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의견서 제출로 피해자 쪽의 이탈을 초래한 외교부의 실책과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 하락이 요인으로 작용했다. 피해자의 반발과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윤 정부는 피해자와 국민을 설득하기보다는 일본을 설득하여 양보를 얻어내기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또다시 판결의 주술과 현금화의 덫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제 정부는 한 손에 국익론이라는 논리와 다른 한 손에 남겨진 해법을 들고 일본을 향해 적당히 안배된 기금 참여와 적절히 조절된 사죄 표명을 구애하게 되었다. 공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은 자국의 실익에 따라 기존의 원칙과 명분 있는 입장을 접고 한국 정부의 구애에 응할 것인가, 아니면 구애를 냉정하게 거절할 것인가. 식민 지배를 통해 참담한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 일본이 지금 이 정도의 양보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한국 국민의 정서를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언제까지 이런 패턴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것이 끝이 아닐 텐데 하며 진저리를 치는 일본 국민의 감정에 따를 것인가. 이것은 일본 정부가 결정할 몫이다.

일본이 전자를 선택한다면 비록 최선의 해법은 아닐지라도, 징용자 문제는 현금화의 덫에서 빠져나와 수습의 단계로 이행할 것이다. 꽉 막힌 상황에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괜찮은 해법이다. 그렇다고 이것으로써 판결의 주술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단지 대법원 판결의 승소자인 15명에 대한 조치에 불과하다. 현재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나머지 1000명에 가까운 피해자, 그리고 공소시효 만료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 피해자, 나아가 15명과 유사한 사례지만 다른 1심 재판에서 패소한 피해자 등의 문제를 차후 어떻게 처리할지 정부는 산적한 난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징용 피해자에게 도의적 책임

반면 일본이 후자를 선택하여 다시 공을 한국 쪽으로 넘긴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한국 정부는 피하고 싶었던 현금화 시행에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 지점에 다다를 한국 정부에 나는 현금화의 덫에서 빠져나와 판결의 주술을 푸는 방법을 과거 한국 정부의 역사적 대응 속에서 찾아 발전시켜 볼 것을 권하고자 한다.

어차피 현금화를 피할 수 없다면 원인이 된 판결의 주술을 풀자. 그러기 위해서는 주술이 걸리기 이전으로 돌아가 한국과 일본, 한국 내 보수와 진보가 공유하는 인식에서 실질적 해법의 실마리를 찾자. 2005년 8월 26일 노무현 정부의 국무조정실에서 발표한 ‘한·일 회담 문서 공개 후속 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개최’라는 제목의 보도자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일 회담 문서를 공개하게 되자, 노무현 정부는 민관공동위원회를 개최하고 한일청구권협정의 법적 효력 범위에 관한 정부 방침을 정리했다. 위안부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 반면 정치 협상을 통해 총액 결정 방식으로 수령한 무상 3억 달러에는 강제동원 피해 보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성격의 자금이 포괄되어 있다.

따라서 정부는 무상자금 중 상당 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지기 위해 1975년 박정희 정부에서 피해자 보상을 처음 실시했으나 불충분했다. 노무현 정부는 오랜 기간 고통을 겪어온 강제동원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도의적·원호적 차원과 국민 통합의 측면에서 정부 지원 대책을 마련하고자 한다.

역사 문제에서 불가역적 해결은 환상

이러한 내용을 결정한 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은 이해찬 국무총리였고, 당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정부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이 방침에 따라 한국 정부의 2차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이 실시되었다. 따라서 징용자 문제에 관한 한 윤 정부는 1965년 청구권협정과 2005년 확인된 노무현 정부의 방침에 따라 한국 스스로 3차 피해자 보상을 한다는 원칙에 따라 행위를 하면 된다.

앞으로 현금화를 시행하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내려진다면 경매로 나온 피고 기업의 자산을 정부 예산으로 매수하고, 현금화된 금액이 판결 금액보다 적을 경우 정부 예산으로 보충하여 원고에게 지불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도의적·원호적 차원에서 국민 통합을 위한 피해자에 대한 조치임과 동시에 청구권협정을 인정하고 국제법을 준수하라는 일본의 요청에 응하는 답이다.

한편 현금화와 병행하여 역사 화해의 차원에서 이른바 문희상 법안을 여야 합의로 추진하여 특별법을 제정하고 재단을 신설한다. 이 또한 역대 보수·진보 정부가 공유한 인식에 따르는 것이기에 지금의 민주당이 거부할 명분이 없다. 이렇게 신설된 재단에 피고 기업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제공한 후, 정부는 경매로 매수한 자산의 소유권을 피고 기업에 환원한다. 이로써 대법원 판결의 주술이 풀리고 현금화의 덫에서 벗어난 한·일 양국은 미래를 향해 또 한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한·일 역사 화해를 위해 한국이 제시할 선제적 해법에 일본이 호응할지는 그들의 몫이다. 역사 문제에서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해결이란 환상이다. 인내와 절제, 원칙에 따른 용단을 통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화해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