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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당신은 누구십니까?

중앙일보

입력 2022.09.2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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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현목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정현목 문화팀장

정현목 문화팀장

넷플릭스 화제작 ‘수리남’을 연출한 윤종빈 감독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코드 중 하나가 아버지다. 그것도 가족 부양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아버지.

‘수리남’ 주인공 강인구(하정우)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동생들까지 챙기느라, 룸살롱 서빙, 식재료 납품, 유흥주점·카센터 운영 등 돈 되는 일은 뭐든 한다. 홍어 사업을 위해 지구 반대편 수리남으로 가는 것도 가족 부양을 위해서다. 마약상에 맞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윤 감독의 이름을 널리 알린 10년 전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의 주인공 최익현(최민식) 또한 헌신적인 가장이다. 조폭에 몸담고 이권 다툼, 부정 청탁 등 불법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만 다를 뿐, 혼자 동생들 뒷바라지는 물론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처지는 인구와 다르지 않다.

‘수리남’ ‘범죄와의…’ 윤종빈 감독
한국 현대사 버텨온 아버지 응원
“내 자식은 나처럼 고생하면 안돼”
‘K아버지’ ‘K가장’ 조어까지 나와

‘수리남’ 주인공 강인구(하정우)는 강인하고 헌신적인 K아버지다. [사진 넷플릭스]

‘수리남’ 주인공 강인구(하정우)는 강인하고 헌신적인 K아버지다. [사진 넷플릭스]

‘범죄와의 전쟁’ 기자간담회에서 윤 감독은 대학 신입생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시 윤 감독은 “나와 거의 소통을 않던 무뚝뚝한 아버지가 밖에선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상상에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했다. 물론 경찰 간부였던 윤 감독 부친과 건달이 되지 못한 ‘반달’ 익현은 공통점이 없다. 윤 감독에게 이 영화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아버지, 당신은 누구십니까?’란 질문이었다.

‘수리남’ 평론과 기사에서 흥미로웠던 건, 주인공 인구를 수식하는 말로 ‘K아버지’ 또는 ‘K가장’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K가 붙는 다른 장르들처럼, 한국 아버지에게도 고유한 속성이나 맥락이 있다는 얘기일 터. 그건 ‘부성애’ 만으론 설명하기 힘들 것 같다.

‘K아버지’는 더 헌신적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고, 내 자식은 나처럼 고생해선 안된다며 아낌없이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고 자식을 출세시키기 위해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다.

‘범죄와의 전쟁’ 익현은 밖에선 온갖 더러운 때를 묻히고 들어오지만, 식탁에선 아들에게 ‘콩글리시’ 발음으로 영단어 암기 테스트를 하고, 학원 진도를 챙긴다. ‘수리남’ 인구 또한 지구 반대편 감옥에서도 국제전화로 자식들에게 공부를 독려하고, 성적표까지 확인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가진 건 몸뚱아리밖에 없는 수많은 가장이 달러를 벌기 위해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모래 먼지와 석탄 가루를 들이마시며 일해야 했던 고난의 역사 또한 ‘K아버지’에 녹아 있다. 그런 희생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가 ‘국제시장’이다.

흥남 철수 때 생이별한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덕수(황정민)는 독일 탄광, 베트남 전쟁터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악착같이 돈을 벌고, 결국 가족을 지켜낸다. “당신 인생에 왜 당신은 없냐”는 아내 영자(김윤진)의 대사처럼, 덕수는 가족을 위해 눈 가린 경주마처럼 내달릴 뿐, 자신의 안위는 생각조차 않는다. 처자식 입에 따뜻한 밥 들어가는 걸 보는 게 유일한 행복이다. “힘든 세상풍파를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이라는 덕수는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돼서야 아버지 영정사진을 부여잡고 “이만하면 저 잘 살았지예?”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범죄와의 전쟁’ 후 10년, 윤 감독은 가장이자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면서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걸까. ‘범죄와의 전쟁’에서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빌붙고, 권력에 머리를 조아리는 가장의 모습을 관조적으로 처연하게 그려냈던 그는 ‘수리남’에선 가족을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가장을 영웅 캐릭터로 부각시킨다. 그를 통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이 시대 가장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수리남’에는 인구 말고 또 다른 가장이 등장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와 소처럼 일하다 과로사하는, 인구의 과묵한 아버지 말이다. 그런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30년이 걸렸다는 인구는 “삶의 무게가 당장의 슬픔을 짓눌렀기에 아버지는 아내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 삶은 여전히 무거웠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어떻게든 잘살아보겠다고 바둥거리다가 결국 그렇게 돌아가셨다. 내 아이들은 나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읊조린다. 이 독백은 ‘아버지, 당신은 누구십니까?’란 10년 전 질문에 대해 윤 감독이 내놓은 답처럼 느껴진다.

아버지의 진심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이해하고, 자신 또한 그 길을 걷게 되면서 이 땅의 모든 남자는 그렇게 아버지가 돼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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