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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재섭이 고발한다

보기 민망하다 '70세 진보 대학생' 이해찬…이제 현실로 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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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섭 국민의힘 서울 도봉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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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오른쪽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 청와대 비서진. 운동권 출신 정치인과 학자, 시민단체 소속 학자들이 대거 포진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왼쪽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오른쪽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 청와대 비서진. 운동권 출신 정치인과 학자, 시민단체 소속 학자들이 대거 포진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어른이 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터 팬처럼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자신만의 네버랜드에 머물면서 성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리곤 숙적 후크 선장과의 대결을 반복한다. 웬디처럼 진작 네버랜드를 떠나 성인이 됐다면 굳이 할 필요 없는 싸움을, 어른이 되지 않기로 결정했기에 매번 다시 해야 하는 셈이다. 비단 동화 속 얘기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냉정한 현실을 외면한 채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피터 팬 증후군을 앓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정치권에도 물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올해로 만 70세인 이해찬 전 대표가 최근 회고록을 냈다. ‘청양 이 면장댁 아들로 태어난 행운’으로 시작하는 이 회고록에서 그는 1972년 유신체제부터 2022년 윤석열 정부에 이르는 대한민국 정치사 50년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꽉 채웠다. 좋게 표현해 해석이지, 사실상 왜곡에 가깝다. 아무리 내 편으로 팔이 굽는 게 인지상정이라지만 모든 사안에 진영 논리를 들이대는 것으로도 모자라 버젓이 살아있는 생존 인물에 대해서도 사실을 비틀어 내 편이면 포장하고 남의 편이면 폄훼하려는 걸 보니 이쯤 되면 회고록을 빙자한 두꺼운 찌라시나 뭐가 다른지 알 수가 없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회고록 표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회고록 표지.

가령 민주당 출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준비된 대통령, 반면 보수 진영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모든 게 후퇴한 시기'로 평가한다. 현직인 윤석열 대통령, 그리고 그와 붙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평가도 물론 있다. 하나하나 인용하지는 않겠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민주당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우리 국민이 기득권 카르텔에 속아 재집권에 실패했을 뿐이다.’ 시대에 눈뜬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일반 국민은 계몽의 대상이라는 시대착오적 운동권 사고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980년대나 통할 이런 얘기를 회고록에 담은 걸 보면서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안타까웠다. 나를 비롯해 우리 국민은 분명 2022년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해찬 전 대표는 자신보다 덜 배운 부모 세대를 가르치려 들던 50년 전 진보 대학생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 같으니 하는 말이다.
'배운 나(운동권)와 못 배운 너(국민)'라는 식의 편 가르기는 이 전 대표를 비롯한 그 시절 운동권들의 장기였고, 그 이후에도 이런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그가 정작 이번 회고록에서는 엘리트 기득권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후보가 붙었던 지난 3월 대통령 선거를 ‘한국 사회 최고 엘리트 기득권 카르텔이 모든 분야에서 작동한 선거’로 정의했다. ‘강남 3구, 특목고, SKY 출신이 공무원 사회의 주류가 됐다’며 '보수적 엘리트 카르텔이 각 분야를 좌지우지할 테니 우리 사회 장래로 볼 때는 굉장히 나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기득권 2세가 검찰, 언론, 관료집단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이 기득권 카르텔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정권 잃어서 화가 나는 것도 알겠고, 민주당 의원들을 줄줄이 봉숭아 학당 맹구로 만들어버리는 한 장관이 밉기도 하겠다는 것도 이해하지만 이쯤 되면 지나친 '억까'(억지로 비판하기)가 아닐 수 없다.

똑같은 이야기를 사회 개혁에 열심인 20~30대가 했다면 비록 진영이 달라도 얼마든지 격려하겠다. 엘리트 기득권만 해체하면 세상이 정의로울 거라는 식의 순진한 열정까지도 응원할 수 있다. 그런데 대학 새내기도 아니고 온갖 기득권을 다 누려온 인물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라고 본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민주당은 대통령은 물론 주요 지방 정부를 장악하고, 국회는 물론 광역의회·지방의회까지 모조리 석권하지 않았나. 게다가 국회의원 구성만 봐도 이 전 대표가 ‘주적’으로 상정한 SKY 대학 출신 엘리트는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 훨씬 많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군사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의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원 안). 당시의 방송 뉴스 화면. 중앙포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군사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의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원 안). 당시의 방송 뉴스 화면. 중앙포토

이 전 대표는 주류 중의 주류, 기득권 중의 기득권으로도 모자라 실질적인 상왕 노릇을 하면서 국민 위에 군림해왔다. 정권과 의회 권력을 양손에 다 쥐었던 문재인 정부 시기 국민에게 보인 오만함 탓에 민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잃어버렸다. 행정부와 의회는 물론 촘촘한 시민사회 이권 네트워크까지, 카르텔이라고 하면 민주당을 따를 수가 없다. 민주당의 최고 어른인 그가 스스로를 여전히 70~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는 진보 대학생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면 엘리트 카르텔 운운하는 소리를 감히 내비칠 수 없었을 거다.

특히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한동훈 장관을 언급하며 능력주의를 비판한 대목이다. 이 전 대표는 ‘공정하게 시험을 쳐서 뽑는다는 것이 사회 구조적으로는 불공정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며 ‘보수적인 엘리트 카르텔이 각 분야를 좌지우지한다’고 했다. 한 장관은 SKY 대학 출신 강남 기득권이고, 기득권은 나쁘고, 그러니 기득권을 유지하는 시험 중심의 능력주의는 나쁘다는 주장이다. 무책임할뿐더러 한마디로 무논리에 몰염치다.

우리 국민은 지난 2019년 조국 사태를 통해 엘리트와 능력주의를 대하는 민주당의 이중적 태도를 이미 목격한 바 있다. 정치적 셈법으로 엘리트와 기득권을 악마로 몰아세우지만 정작 본인들은 기득권을 세습하기 위해 불법도 마다 않던 그 모습 말이다. 백번 양보해 현실과 이상 사이에 괴리가 있다 치자. 하지만 이 전 대표를 비롯해 민주당은 시험 중심 능력주의만 무조건 비판하면서 정작 더 나은 대안은 한 번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험을 없앤 공간에 제 식구 챙기기 수준의 정실주의만 스며들게 했다. 공공 의대에 시민단체 추천 전형을 무리하게 넣으려 하고, 마치 한국 민주화가 자기들 몇몇 카르텔만의 공인 양 민주화운동 유공자 자녀를 위한 대입 특혜를 주는 게 대표적이다.

2020년 10월 '정시확대추진 학부모모임'과 '교육바로세우기 운동본부' 회원들이 연세대 앞에서 민주화 유공자 관련 전형에서 합격한 신입생의 부모 명단 공개를 촉구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뒤부터 그때까지 연세대 수시모집에서 민주화 운동 관련자 자녀라서 합격한 신입생이 최소 18명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주장했다. 뉴스1

2020년 10월 '정시확대추진 학부모모임'과 '교육바로세우기 운동본부' 회원들이 연세대 앞에서 민주화 유공자 관련 전형에서 합격한 신입생의 부모 명단 공개를 촉구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뒤부터 그때까지 연세대 수시모집에서 민주화 운동 관련자 자녀라서 합격한 신입생이 최소 18명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주장했다. 뉴스1

이 전 대표가 능력주의를 제거한 사회는 어떤 결말을 맞는지 정말 모르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역사를 뒤적여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자격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부와 지위를 쟁취했던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새로 등장한 또 다른 귀족들이 차지한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소련에서는 노멘클라투라가, 중국에서는 태자당이, 북한에서는 백두혈통이 그랬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주류일수록 더 강력한 정실주의로 새로운 기득권을 더 공고하게 쌓았다. 혈통과 인맥이 시험을 대신한 거다. 이 전 대표가 책에서 소년공으로 극찬한 이재명 대표도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 덕분에 그 자리까지 갈 수 있었다. 내가 눈을 감는다고 실존하는 세계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이해찬 전 대표는 이제라도 네버랜드를 떠나 현실로 돌아오시면 좋겠다. 칠순이 넘어 진보 대학생 연하는 모습을 보기가 민망해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