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문장으로 읽는 책

문정희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시시! 하다가 그만 시시해지고 말았다/ 뼈 마디마디 숭숭 구멍 뚫려/ 삐걱대는 시간/ 물무늬 반짝이는 백지 한 장이/ 전 재산이다//(…) 시는 침묵이 쓰는 것/시는 뼛속에 뚫린 구멍에서/ 태어나는/ 피리 소리/ 혹은 버섯 피는 소리를 받아쓴 작곡가처럼/ 아직 누설되지 않은 비밀에/ 눈과 코와 귀를 박는 것/ 빈 항아리처럼/ 허공을 향해 흐느끼는 속울음// 그러니 시시!하던 내가/ 직업란에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생애를 던졌다지만 어느 직업군에도 없는/ 그리운 이름 하나 되려고/ 기꺼이 시시! 하다가/ 원 없이 시시해지고 말았다

문정희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시인은 코로나 검사를 하러 갔다가 직업란에 ‘시인’이 없자, 이런 시를 썼다. 제목이 ‘시시’다. “여기까지 나를 끌고 온 것은/ 무엇인가/ 나는 시에게 물어보았지만/ 시는 답을 주지 않았다”(‘여기까지 나를 끌고 온 것은 무엇인가’) 처럼 시란 무엇인지 묻는 시들이 많다.

“슬픔은 헝겊이다/ 몸에 둘둘 감고 산다/ 날줄 씨줄 촘촘한 피륙이/ 몸을 감싸면/ 어떤 화살이 와도 나를 뚫지 못하리라”(‘슬픔은 헝겊이다’),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도착’) 같은 시에서는 마음이 따듯해진다.

70대 현역 시인의 열다섯번 째 시집이다.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앞으로 쓸 얘기가 너무 많아서 미칠 것 같다. 지금 시대에 가장 팔팔 뛰었던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