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삼계탕 닭 다리 쥐여주고 싶고 겨울에는 호동 오빠 얼굴만 한 호빵 쥐여주고 싶어….”
중학생이던 2014년, 스타 팬덤을 다루는 TV 예능프로그램(MBC ‘별바라기’)에 출연해 좋아하는 가수 정준영에게 이 애틋한 자작시를 직접 들려주며 ‘성공한 덕후(성덕)’가 됐던 오세연(23) 감독은 불과 5년 뒤 실패한 덕후로 추락했다. 정준영이 2019년 버닝썬 수사와 맞물려 성 착취물을 만들고 단체 채팅창(단톡방)에 유포한 성범죄자란 사실이 드러나 오 감독도 덩달아 강제 ‘탈덕(덕질을 그만둠)’하게 되면서다.
선망하던 스타가 범죄자가 됐을 때 팬들은 어떤 심정이 될까. 28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성덕’은 오 감독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팬 10여명을 3년간 인터뷰해 만든 작품. 그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진학 후 만든 첫 영화다.
“어느 날 ‘오빠’가 범죄자가 되었다”는 충격과 분노, “걔를 좋아하는 건 사회의 악을 돕는 거다. 그냥 전자발찌 채웠으면 좋겠다” 등 스타를 향한 따끔한 질책까지 ‘덕후’들의 진솔한 고백을 블랙코미디처럼 담아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한다더니 왜 감옥에 있어요?” “나의 수많은 처음에는 그 사람이 있었다. 법원에까지 있을 필요는 없었는데….” 오 감독의 이런 자조 섞인 내레이션부터 웃음이 터진다. 그가 이 영화 조감독 김다은과 떠나보낸 아이돌의 굿즈(기념품)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도 재밌다. 김 조감독은 가수 승리의 팬이었지만 버닝썬 파문 이후 덕질을 그만뒀다.
85분의 짧은 상영 시간을 발랄한 어조로 채운 다큐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느껴진다. 실제 팬이어야 알 수 있는 속사정을 깊숙이 파고들어 생생한 증언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부산 국제영화제에 처음 공개된 이 다큐는 입소문이 나며 광주 여성영화제·무주 산골영화제 등 초청된 영화제마다 티켓이 동났다. 부산 출신인 오 감독이 ‘메이드인 부산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은 부산 독립영화제에선 “이 영화 티켓을 구한 내가 ‘성덕’”이란 관람평이 등장했을 정도다.
이 다큐가 이토록 주목받은 데는 K팝의 급성장 속에서도 아이돌 산업을 지탱해온 팬들의 목소리는 그간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다는 이유도 크다. 다큐에서 자신의 스타가 성범죄자로 드러난 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던 어느 팬의 고백은 그간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것이다. 그 가수의 생각이 담긴 노랫말을 좋아했고 자유로운 생활방식을 응원했던 지난날이 참혹한 범죄를 낳은 시간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적잖은 돈과 시간을 쓰며 ‘덕질’한 결과로 원치 않게 ‘범죄자 팬’으로 전락한 이들의 흑역사는 그저 개인적인 실패로 치부하기 어렵다. 지난해 이 영화를 상영한 서울독립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서 김소혜 시카고대 동아시아 연구학 박사는 “K팝의 세계적 성공과 함께 아이돌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팬덤은 무책임하고 탐욕적인 산업 시스템에 의해 끝없이 착취당하고 배신당한다”고 분석했다.
다큐에서 오 감독은 맹목적인 팬심 그 자체에 대해서도 탐구한다. “우리 오빠 그런 사람 아니다”라며 여전히 남아있는 일부 팬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자신 역시 과거에 그랬다고 인정한다. 정준영 사건이 최초 보도됐을 때 해당 기사를 쓴 기자를 증오하고 공격했던 것을 반성하면서다.
그는 다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태극기 집회를 방문하며 연예인 팬덤과 정치 팬덤의 연결고리도 들여다본다. 19일 본지와 통화에서 오 감독은 “대다수한테 욕먹는 상황에서 그 사람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왜 이렇게 비슷해 보일까 하는 단순한 출발이었다. 범죄자인데도 그 사람이 억울하다고 믿는 것이 겹쳐 보였다”고 전했다.
다큐엔 연예인들의 실명이 언급되지만, 홍보자료에선 모두 ‘×××’라 처리했다. 영화제 상영 후 개봉 준비하며 법률자문을 받은 결과라고 오 감독은 설명했다. “청소년기에 멋있다고 생각한 스타였던 만큼 지금의 제 취향에도 그의 영향이 크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씁쓸하다”는 그는 “그런 범죄를 저지른 스타는 복귀를 안 했으면 좋겠다. 법적 처벌 후에 복귀한다 해도 저는 소비하지 않을 것 같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팬 문화’의 긍정적인 면을 여전히 믿는다고 했다. 잘못은 스타가 했지, 팬 문화의 순기능까지 잃을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성덕’ 기획 의도에서도 그는 “‘빠순이’라 욕먹고 무시당했던 덕후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우리가 보낸 즐거웠던 시간, 힘겨웠던 날들, 무너진 마음을 재건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이 다큐에) 훨씬 중요했다”고 밝혔다.
“‘덕질’이란 게 물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 잘못이고 사과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기가 행복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좋은 영향을 받고 자기 삶을 윤택하게 꾸려나간다면 ‘덕질’은 여전히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