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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한복판서 이란 노래가…150명 검은옷 입고 모인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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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의 이름은 이 칠판에 남아 있어. 불의와 억압의 상처가 우리 몸에 흉터를 남겼지.”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이란인들의 민중가요 ‘나의 초등학교 친구’(یار دبستانی من)가 울려 퍼졌다. 1979년 이란 혁명 등에서 즐겨 불리며 이란 민주주의 상징이 된 노래였다. 재한 이란인 150여명이 이란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히잡 미착용 의문사’ 항의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역삼동의 ‘테헤란로’ 표석앞에 모였다. 이들은 “독재자는 물러가라” “이란의 자유를 위하여”를 외쳤다.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재한 이란인들이 '히잡 미착용 의문사'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이병준 기자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재한 이란인들이 '히잡 미착용 의문사'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이병준 기자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 13일(현지시간) 22세 여성 마사 아미니는 이란 내에서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이슬람 복법 등을 집행하는 이란 경찰 기관)에 체포됐다. 아미니는 체포 후 당일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고, 사흘만에 사망했다. 이란 당국은 아미니가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유족 측은 아미니가 경찰 폭행으로 당한 부상이 사망 원인이라고 반박했다. 논란이 격화되면서 이란에선 80개 이상의 도시에서 경찰의 과잉 대응에 항의하는 반정부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이란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등 강경 대응하면서 현재까지 16살 소년 등 최소 50명의 시민이 숨졌다고 한다.

이날 집회 참여자들 대부분은 검은 옷차림이었다. 손에 들린 플래카드에는 아미니의 사진이 그려졌고, ‘여성, 삶, 자유’ 등 문구가 적혔다. 집회 현장엔 현재 이란에서 사용이 금지돼 있는 1979년 이란 혁명 이전 팔라비 왕조의 국기도 나부꼈다.

“히잡, 선택지 돼야”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재한 이란인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이병준 기자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재한 이란인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이병준 기자

이란인들은 입을 모아 히잡 착용 의무화를 비판했다. 이란은 1983년부터 국적과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법안을 시행하고 있다. 집회에 참석한 유학생 A(19)는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무엇을 입을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며 “우리도 무슬림이고, 우리 역시 히잡을 입는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그건 다른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선택지가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학생 B(24)는 “히잡을 입는 것 자체가 너무 귀찮고, 입으면 너무 덥다. 한국에선 반팔에 반바지만 입어도 너무 덥지 않냐”며 “이런 걸 강요하는 데다가, 이제 경찰이 사람까지 죽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종교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믿고 싶으면 믿으면 된다. 하지만 이란에선 종교가 법이 되고, 독재자의 통제 기구가 됐다”며 “민주주의 역시 제도는 갖춰져 있지만 부정 선거가 계속 이뤄지고 있다. 정부-종교의 분리와 국제 사회의 응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란인들은 지금까지 이란에서 경찰 강경 진압으로 사망한 시위대의 숫자가 훨씬 많을 것으로 예측했다. 이란 출신으로 1990년대에 한국에 귀화했다는 박씨마 목사는 “2019년 시위 때도 경찰 진압으로 약 1500명이 죽었지만, 정부는 몇십 명이 죽었다고만 발표했다. 밤샘 시위가 계속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이란 언론은 시위가 금발 끝날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며 “한국을 포함해 국제 사회가 이란 정부에 대해 항의를 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 5년째 체류 중인 자드 알민(28)은 “어린 시절 친구가 이번 시위에 나갔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총을 맞았다고 했다.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심경”이라며 이란 정치인들을 향해 “우리를 이제 놓아 달라”고 했다.

이날 비슷한 시각 부산 서면에서도 재한 이란인들의 집회가 열렸다. 해외 거주 이란인들은 미국, 캐나다,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튀르키예 등지에서도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재한 이란인들은 오는 28일 주한 이란 대사관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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